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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다시 또 생각해 보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의 가치에 대하여

[섬진강칼럼] 다시 또 생각해 보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의 가치에 대하여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3.3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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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봄꿈이 한창인 구례읍 봉산에 하루해가 저무는 모습이다.
사진 설명 : 봄꿈이 한창인 구례읍 봉산에 하루해가 저무는 모습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어제(30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대략 2개월에 한 번씩 반드시 광주에 나가야 하는 긴한 일이 있는데,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섬진강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전대병원 앞에서 54번 버스를 타고 3시 30분 경 말바위시장 정류장에서 내리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바로 내 앞에서 나이 70후반 쯤 되었을 할머니가 버스 계단을 내려가다 굴러 떨어졌다.

하차하는 버스 마지막 계단에서 그냥 그대로 의식을 잃고 아스팔트 바닥으로 퍽 소리를 내면서 쓰러진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황급히 뛰어내려 괜찮으냐는 말을 건네면서 상황을 확인하는데, 다행히 의식은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불과 몇 초 사이에 판단한 일이었지만.) 의식을 확인한 후 가장 위급한 것은 쓰러지면서 버스 밑으로 들어간 두 발을 빼내는 일이었다.

주먹으로 버스를 두들겨 기사에게 사고가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소리를 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버스가 출발하지 못하게 막은 후,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두 발을 버스 밑에서 빼낸 뒤,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는데, 일어서지를 못하고 다시 힘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찰나의 순간을 망설이다, 할머니의 등 뒤에서 양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뒤에서 안은 형태로 옆에 있는 정류장 의자에 앉혀놓고 나서, 의식이 완전하게 돌아온 할머니로부터 괜찮다는 확인을 하고 3시 5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구례로 돌아왔는데......

버스를 타고 섬진강 구례로 돌아오는 내내 생각나는 것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뼈아픈 경험과 함께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문제 하나, 인간의 생명과 존엄 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었다.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을 때 3시 35분이었으니, 대략 3시 33분을 전후로 불과 1~2분 사이에 벌어진 생사를 다투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바로 내 앞에서 쓰러진 한 인간을 구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반사적으로 행동하면서도, 정말 극히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죽느냐 사느냐는 위기에 빠진 사람보다, 아차 하면 과거처럼 다시 뒤집어 쓸 수도 있는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나 자신을 안전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고민하고 행동했던 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과연 그랬어야 했는지를 다시 곱씹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곱게 잘 차려입은 체중 50Kg을 조금 넘을까하는 왜소한 할머니라, 아직 그 정도 무게는 한 손으로라도 들 수 있는 힘은 있지만, 문제는 낯선 할머니고 더하여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남자이거나 아는 사람이라면, 다짜고짜 번쩍 안아서 옮기거나, 힘이 부친다면 팔 다리는 물론 옷가지 등 아무거나 잡아서 끌어내 다급한 위기를 해소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낯선 할머니라 조심스럽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행여 구하는 과정에서 얼굴 등을 아스팔트에 긁히는 등 2차 3차 피해가 없게 하는 것은 물론 최소한 이런저런 오해가 없는 동작으로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 깜짝 놀라 뛰어내려서 쓰러진 할머니의 상태를 살펴보면서 그랬었고, 의식을 확인한 후 우선 안전한 인도로 할머니를 옮기는 과정에서, 어깨를 잡아 부축하고 있는 나를 향해 쓰러진 탓에, 2차 사고는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극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사실상 의식이 없는 할머니의 몸 어디를 잡아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를 고민했었고, 그런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것은, 주저앉은 할머니의 등 뒤에서 양 겨드랑이 사이로 내 두 팔을 넣어, 정확히 설명을 하면, 내 두 손이 아닌 두 팔을 뻗어 팔뚝으로 할머니를 안아 일으켜 안전한 장소로 옮긴 상황이 그랬었다.

부연하면, 지난겨울 구례읍 오거리 청자다방 앞 건널목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 스마트폰을 몰입하여 보다가 사고를 당할 뻔한 어린 여중학생을(?) 구한 일이 있었다. (당시 내가 막지 않았다면 아이는 100% 차에 치었을 일이었고 아이가 그걸 확인하였다.)

그때도 내가 제일 먼저 한 말과 행동은, 스마트폰에 빠져 차가 오는 것을 모르고 차도로 나가 차에 치이려는 여학생을 제지하여 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순간적인 신체접촉에 대하여, 혹 불쾌했다면 미안하다는 사과였는데, 그때 아이로부터 살려주어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으면서도, 아이가 스스로의 상황을 인지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백주 대낮에 사람을 구하고 빼도 박도 못할 누명을 쓸 뻔했다는 아찔한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쉰 일이 있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어제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일이었다.

정리를 하면, 어제 광주 말바우시장 버스정류장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일이 그렇고,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또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과 존엄 둘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것이며, 과연 나는 한 인간의 생명과 존엄 가운데 무엇을 구했느냐는 것이다.(사실은 구했다는 표현보다는 잠깐 도왔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늘 그렇듯 다만 내 눈앞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을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사람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해소하여 주었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고 살지만.......

문제는 똑같은 상황일지라도, 생명과 존엄 둘을 놓고,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느냐는 것은, 구조하는 사람과 구조를 받는 사람이 다를 수 있고, 다른 그 가치가 서로 어긋났을 때, 특히 구조를 받은 사람 스스로가 용납이 되지 않아 문제를 삼는다면, 구조를 한 사람은 살아온 인생 자체를 송두리째 망치는 심각한 범죄가 돼버린다는 사실이다.

끝으로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후, 한 손을 하늘로 쳐들고 다른 한 손은 땅을 가리키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가장 존귀하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친 석가모니의 참뜻은, 이 무궁한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인간 자신의 생명과 존엄을 동시에 천명한 것인데......

이 봄날 어리석은 섬진강 촌부가 다시 또 절감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정신으로 살아가면서 인간이 즐겁고 행복한 인간세상을 구현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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