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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자호(自號) 허생(虛生)을 지으며

[섬진강칼럼] 자호(自號) 허생(虛生)을 지으며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6.13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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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창문 밖 뜬 구름이 虛生이 무엇인지를 일러주고 있다.
사진 설명 : 창문 밖 뜬 구름이 虛生이 무엇인지를 일러주고 있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찾아온 이가 우편함에 쓰인 세대주 명 허당(虛堂)을 보고, 선생님 집이 아니었느냐고 하면서 집주인이 누구냐고 묻기에, 보시는 이름 그대로 “허당(虛堂)이니 허생(虛生)”이 주인이라고 하였다.

처음 우편함 세대주 이름으로 써 놓은 허허당(虛虛堂)의 약칭인 허당(虛堂)을 보고 의아했다가, 이내 알아채고 장난삼아 묻는 이에게, 나 역시 장난삼아 虛生이 주인이라고 하였더니 정색을 하면서 집의 주인인 虛生이 누구냐고 다시 묻기에 “虛라고 하였다.

집주인 虛生이 虛라는 내 말을 듣고 虛? 虛가 주인이냐며, 지금 그 주인 계시면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다 하기에, 지금 면전에서 뵙고 있지 않느냐며 웃었더니, 텅텅 빈 허공 쉼 없는 하늘을 보면서 몰라 뵈어 죄송하다며 웃었다.

찾아온 이가 떠난 뒤 문득 드는 생각은, 비록 실없는 농으로 주고받은 이야기였지만, 문(門)이 없는 門을 통해서 드는 집 虛虛堂의 주인이 虛生이라는 말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니라서, 虛堂에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보내기를 소원하는 어리석은 촌부를 칭하는 별칭으로 딱 맞는 말이기에 虛生을 자호(自號)로 하였다.

우리네 사람이라는 실체를 보면, 몸이 마음을 의지하고 마음이 몸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지만, 그 둘 가운데 주인이 누구냐는 근본을 따져보면 몸과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실체가 없는 虛이고 종내는 저 텅텅 빈 허공(虛空) 쉼 없는 하늘인 허공계(虛空界)로 돌아가는 것이니, 그런 몸과 마음이 인연이 되어 잠시 금생을 함께 살아내고 있는 인생 역시 맑은 하늘에서 일었다 사라지는 한 조각 뜬 구름과 같은 실체가 없는 虛生이기에 하는 말이다.

막상 “자호(自號) 허생(虛生)을 지으며,” 제하의 글을 써 놓고 오탈자를 찾으며 드는 생각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虛生인지, 정작 虛生으로 살겠다는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이 虛生이고, 虛生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글도 어리석은 虛生이 허문(虛文)을 쓴 꼴이 돼버렸는데, 콧노래를 부르며 살 일도 없고, 그렇다고 콧노래를 부르며 찾아올 이도 없는 인생이고 세월이 될 것인데......

날마다 창문 밖 텅텅 빈 하늘에서 쉼 없이 일었다 사라지는 뜬 구름처럼, 날마다 오는 하루를 그렇게 살아지는 대로 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는 생각인데, 눈에 비친 한 조각 뜬 구름의 모습이, 어리석은 나에게 어떤 것이 虛生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虛生인지를 다시 일러주고 있다.

문(門)이 없는 허허당(虛虛堂)에서

2023년 6월 13일 어리석은 허생(虛生) 박혜범(朴慧梵)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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