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섬진강칼럼] 문 없는 문에서 쓰는 글

[섬진강칼럼] 문 없는 문에서 쓰는 글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6.09 22:16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없는 하늘
문없는 하늘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계묘년(癸卯年) 검은 하늘이 검은 하늘에다 검은 토끼 굴을 지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비록 별 볼일 없이 살아온 별 볼 것 없는 인생이지만, 평생을 구례의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봉성산(鳳城山)을 사랑하며 살았던 한 사람으로, 우여곡절 끝에 봉산(鳳山) 신령의 도움으로 금생의 생을 마감하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자리를 찾아 앉았다는 의미다.

처음 나 죽어 돌아갈 본래의 고향인 허공바다, 저 텅텅 빈 허공, 쉼 없는 하늘로 돌아가는 자리를 찾아서 반야봉을 오르는 등, 길이 없는 길을 헤맨 끝에, 신령한 봉산이 베풀어 준 기이한 길, 길이 아닌 길, 정확히는 길이 없는 길을 올라 텅텅 빈 허공에 집이 아닌 집을 짓고, 문이 없는 문기둥에 쓰는 주소의 세대주로 허허당(虛虛堂) 약칭 허당(虛堂)을 걸어놓고 자리에 앉아 몇 자 소회를 쓰려니 모든 것들이 낯설고 어설프기만 하다.

이따금 지나는 사람들이 왜 문에 문을 달지 않느냐고 물을 때마다, 보시다시피 허허당 텅텅 빈 허공이 하늘이고 하늘에는 울타리가 없으니 따로 드나드는 문이 필요하지 않아 문에 문을 달지 않았다고, 그래서 “문 없는 문”이라고 설명을 하면, 어떤 이는 한바탕 웃고,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차후 촌부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그리고 이 허허당의 의미에 대하여, 차분히 설명하고 모든 이들과 함께 공유할 계획이지만, 더는 욕심이고 힘에 부치는 일이라, 그럭저럭 그런대로 사람인 내가 할 수 있는 정리는 이 정도에서 끝내고, 나머지 정리는 세월과 인연이 있는 이들에게 맡겨두기로 하였다.

가만히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2021년 5월 30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리산 반야봉을 상상하지 못했던 이와 함께 올라 생생하게 들었던 반야봉이 들려주는 산상설법(山上說法)을 시작으로, 특히 지난해 그러니까 2022년 5월 2일 벌건 대낮에 두 눈을 뜨고서도 찾지 못했던 터를, 두 눈을 감은 끝에 처음 본 일이 그렇고, 이후 촌부의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고,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포기를 결정하는 순간마다 일어났던 설명 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그렇고, 마침내 2023년 5월 2일 밤, 처음 등불을 켜 밝힌 이 모든 일들은 사람인 촌부가 한 일이 아니었다.

게재한 사진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상상하지 못했던 온갖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봉산의 일을 포기하려는 순간, 하늘이 스스로 허허당의 일을 결정하고 시작하면서, 하늘이 촌부에게 보여 준 한 조각 흰 구름이다.

하늘에 뜬 한 조각 허망한 흰 구름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지만, 봉산 푸른 하늘에서 일었다 사라지는 한 조각 뜬 구름이 보여주고 있는 저 모습을 나는 무엇으로 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것들을 상실하고 지쳐버린 촌부가 다시 힘을 얻어 신발이 닳도록 봉산을 오르내린 끝에 오늘 이 자리에 앉은 기운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허망한 꿈속에서 꿈을 깨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어리석은 촌부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어디까지가 하늘의 뜻이고, 사람의 자식인 내가 맡은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는 없지만, 봉산의 하늘이 그렇듯이, 문 없는 문 허허당에 든 쉼 없는 하늘이 구례군민들은 물론 인연이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과 공유 공감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그렇게 되도록 죽는 그날까지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할 것이다.

촌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여 기회를 주고 허허당을 허락하여 문 없는 문을 열게 하여 준 봉산의 신령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23년 6월 9일 

문 없는 문에서 어리석은 늙은이 박혜범(朴慧梵)씀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