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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복을 비는 주문(呪文)이 아니고 주술(呪術)도 아니다.

[섬진강칼럼]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복을 비는 주문(呪文)이 아니고 주술(呪術)도 아니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7.19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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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물속에서 피어나 물 위에 떠 있으면서도 한 방울의 물에도 젖지 않는 초월과 깨달음의 상징인 연꽃이다
사진 설명 : 물속에서 피어나 물 위에 떠 있으면서도 한 방울의 물에도 젖지 않는 초월과 깨달음의 상징인 연꽃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얼마 전의 일이다. 가끔 찾아가 차 한 잔 마시는 이가 있는데, 표지가 화려하게 제작된 보기 드문 금강경을 읽고 있었다.

신심이 지극한 이라, 별 뜻 없이 지나가는 말로, 이젠 금강경까지 손에 들었느냐며, 대단하다고 하였더니,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냥 사진첩으로 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

타인의 신앙에 대하여, 비록 그것이 잘못된 기복신앙이라 하여도,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 만큼 든 성인이고, 스스로 찾지 않고 묻지도 않는 사람에게, 옳다 그르다 할 일이 아니라서, 그러시냐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오늘 반야심경 첫머리에 나오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실존했던 사람 즉 절대 신으로 믿고 있는 이로부터,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반야심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글귀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사람의 이름으로, 그것도 실존했던 사람으로 인식하고, 이른바 관음신앙으로 믿고 있는 한, 날마다 반야심경을 몇 번을 읽고, 엎드려 천배 만배를 하여도, 한낱 속된 복을 비는 허망한 주문(呪文)이고 기도일뿐, 석가세존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끝내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은 하지 못하고, 온갖 고행 끝에 깨달은 부처님은, 지금의 승려들처럼 복을 빈 적이 없었다고, 석가세존이 깨달은 후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고, 그대로만 하면 될 것이라고, 그러면 마음의 평안을 얻는 등 큰 복을 받을 거라고만 하였다.

인생 말년을 봉산의 허생으로 사는 내가, 오늘 다시 사람들이 알고 있고, 익숙한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이해와 해석에 대하여,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공개적인 글로 쓰려니, 괜히 쓸데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삿된 놈이라는 주변의 오해 끝에, 말문을 닫아버렸던 젊은 날의 내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망설여지는데….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깨달음을 위한 깨우침의 글일 뿐, 사람이 복을 비는 주문(呪文)이 아니고 주술(呪術)도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뭐네 뭐다 하여도, 불교의 핵심 사상인 공(空) 즉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법을 깨우치고 있는 가르침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과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약칭 반야심경(般若心經)과 금강경(金剛經)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세상 어떠한 말로서도 설명할 수가 없는 진리의 깨달음, 즉 다만 스스로 깨달아 알뿐, (깨달아 안다는 것 또한 망상(妄想)이고 허상(虛想)이지만), 말과 글로 가르쳐 줄 수가 없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법을, 지식이 아닌 지혜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금강경이고, 다시 이 금강경을 압축한 핵심이 반야심경이기에 하는 말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난해한 반야심경을 좀 더 알기 쉽게 풀어 쓴 것이, 금강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제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이며, 그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을 누가 증명하느냐는 것인데, 불행하게도 예나 지금이나 해석하는 사람들은 헤아릴 수없이 많지만, 그것이 옳다고 증명해 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는 것이다. 

저마다 내놓는 자기주장만이 있을 뿐이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런 아류의 한 사람이지만, 나름 쉽게 설명한다면, 석가세존이 설명이 난해한 진공묘유의 진리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실 세계의 사례와 비유를 들어서, 자신의 행(行)을 통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 금강경이고, 길고 긴 금강경에서 설명하고 있는 모든 현상들을 스스로 있는 그대로 보고 즉 관(觀)하여 깨우치는 것이, 반야심경임을 아는 이들은, 내 말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진리인 진공묘유의 핵심을 가르치고 있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의미를 두 글자로 해석하면 행(行)과 관(觀)으로, 금강경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 즉 누구나 쉽게 느끼고 알 수 있는 일상의 사례를 생전의 석가세존이 행(行)을 통해서 깨우쳤던 깨달음의 가르침을 기술하여 놓은 경전이고, 반야심경은 그 모든 것들을 가만히 관(觀)하여 깨우치는 경전이다.

봉산의 허생이 단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금강경 첫 장의 제목이 법회를 여는 이유를 설명하는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고, 여기서 가장 먼저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다는 석가세존이 몸소 실천하는 행(行)으로, 그가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저잣거리로 나가, 먹을 밥을 구걸하여 사원으로 돌아오는 일 즉 행(行)인데….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저잣거리로 나가 구걸하는 과정을 기술하여 놓은 글귀, 차제걸이(次第乞已) 환지본처(還至本處)가 금강경 전부이고, 나머지 2장부터 끝 구절인 중생을 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수많은 부처와 보살의 실체가 허상임을 밝히는 제32장 응화신은 진실이 아니라는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까지, 모든 것들이 깨달음의 설법이고 깨우침의 방편으로 이해하면 된다.

문제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익숙하고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금강경 첫머리에 언급된 차제걸이(次第乞已)와, 반야심경 첫머리에 등장하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을, 어떻게 해석하냐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오랜 옛날 처음 원시 경전이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람들에 의해 대륙을 건너오면서, 나라와 문화에 따라 조금씩 경전의 해석이 달라지고, 달라진 그 해석이 다시 세월이라는 길고 긴 시간 속에서, 사람들이 덧붙여 만든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금강경이고 반야심경이라, 이것이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경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석가세존 사후에 만들어진 금강경이지만, 진리를 설하는 경전을 제작하면서, 그 첫머리에 교주이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인 세존이 제자들과 함께 저잣거리로 나가서, 먹을 음식을 구걸하여 오는 행위를, 즉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감추어야 할 쪽팔리는 행위를 보란 듯이, 차제걸이(次第乞已)로 묘사하여 놓은 것을 보면, 즉 세존이 생전에 직접 그러한 행위를 해야만 했던 배경인 칠가식(七家食)과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깨우침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이것이 곧 금강경의 시작이고 전부임을 알 것이다.

잠시 차제걸이(次第乞已)의 배경인, 칠가식(七家食)이 승려들의 걸식 문화로 자리하게 된 연유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세존의 제자들 가운데 가섭존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복이라도 짓게 하려고 가난한 사람들의 집만 찾아다녔고, 반면에 수보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부잣집만을 골라 찾아다녔다.

날마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를 지켜보는 세존의 마음에는, 저잣거리로 나가 음식을 구걸하는 제자들이, 민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착하기는 하나, 저 사람은 가난하니 복을 지어야 하고, 저 사람은 부자이니 괜찮다며 분별하고 차별하는 그 마음 자체가, 해서는 안 될 그야말로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기에,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을 놓고 분별하는 제자들의 잘못된 행위를 깨우치는 차원에서, 몸소 차례대로 일곱 집을 다니며 음식을 구걸하는 것으로, 이른바 상(相)을 떠나서, 반야의 진리로 드는 설법을 한 것이며, 후인들이 이 진리의 깨우침을 차제걸이로 기술하여, 금강경의 문을 열고 완성한 것이다.

결론을 지으면, 금강경 첫머리에 기술된 차제걸이나, 반야심경 첫머리에 기술된 관자재보살은, 석가세존이 실천한 깨달음의 가르침을 금강경은 행(行)으로 반야심경은 관(觀)으로 묘사하여 깨우치는 것으로, 둘이 아닌 하나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말과 글은 달라도 의미는 같은 하나라는 것이다.

부연하면 다른 건 몰라도 만약 반야심경 첫머리에 기술된 관자재보살을 사람 그것도 실존했던 사람으로 해석하고 관음신앙으로 믿는다면, 진리를 깨우치는 깨달음의 경전인 금강경과 반야심경 자체가 자신을 부정하는 허구가 돼버린다는 사실이다.

덧붙이면, 아미타불 왼쪽에 서서 중생들이 정성을 다해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면 화신(化身)하여 돕는다는 관자재보살의 존재는, 반야심경의 첫머리 관자재보살과 서로 어긋나고 부정되는 것으로, 사리에 맞지 않는데, 사실이 이러함에도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은 것은,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을 사람으로 인식하고 끌어다 만든 것으로, 한마디로 기복신앙이 만들어놓은 허구다.

다시 말해서 관자재보살을 사람 또는 독립된 신으로 본다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한 것을 비춰 보고, 일체 고액(苦厄)을 벗어나 해방되었다.”라는 반야심경의 깨우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물론, 전통적인 관음신앙으로 승려들과 사람들이 굳세게 믿고 의지하는 아미타불의 현신(現身)이고 화신(化身)이라는 신앙의 근본까지 송두리째 부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이 글을 읽은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일러두고 싶은 말은, 혹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만 다름으로 이해할 뿐, 특별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깨달음을 통해서 진리의 세계로 나가는 깨우침의 글일 뿐, 복을 비는 주문도 주술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인식하는 그 마음에 지혜의 등불을 켜고,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읽되, 금강경은 첫 장에 밝혀놓은 세존의 행(行)인 차제걸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반야심경은 첫머리 관자재보살을 사람이 아닌 문장으로 해석하여, 나머지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문(門)이 없는 문 허허당(虛虛堂)에서

2023년 7월 19일 허생(虛生) 박혜범(朴慧梵)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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