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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백척간두(百尺竿頭)하거든, 진일보(進一步)하라

[섬진강칼럼] 백척간두(百尺竿頭)하거든, 진일보(進一步)하라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7.08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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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마지막 어떤 연꽃으로 피어 카페 허밍의 벽을 장식할지 궁금한 작품이다.
사진 설명 : 마지막 어떤 연꽃으로 피어 카페 허밍의 벽을 장식할지 궁금한 작품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병상에 누운 지 어언 반년 세월

지팡이 겨우 세워 걷는 길에

어미 잃은 어린 딸이 아장아장 따라오며

아버지 조심하라 타이른다.

허어 옛적의 도화동 심봉사

그 마음이 이러하였을까

늦가을 바람소리 쓸쓸하여

차마 나도 못 듣겠네.

위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제하의 시는 1999년 늦가을 어느 날 지은 것이다. 그해 5월 8일 아침 발생한 전복사고로 중상을 입고, 몇 개월을 병원에 누워 있다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서 보조기구를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걷는 걷기운동을 하던 당시, 4살이던 딸아이가 보호자처럼 졸졸 따라 다니면서, 아버지 조심하라고 큰소리로 신신당부를 하며, 애를 태우던 상황을, 그대로 쓴 것이다.

어떻게든 온전히 살아서, 살아내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서, 절박한 심정으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아비에게, 큰소리로 조심하라고 조바심을 치며, 타이르듯 소리치던 어린 딸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기에 그렇게 간절했는지, 그때도 물어보지 않았고 (기억이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장하여 어른이 된 지금도 물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심정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들었던 가슴을 저미는 소리의 기록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원효대사가 “나지마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마라 나는 것이 괴롭다.”며 “나고 죽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설한 법문의 뜻이 무엇이겠는가?

나름의 개똥철학으로 해석하면, 나고 죽음이란 한 생각이 일었다 사라지는 공허한 것으로, 한마디로 이 우주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헛된 나고 죽는 일에, 공연히 휘말려 겪는 수고이고 괴로움이기에, 그리 법문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흔히 30미터 높은 장대 위에서, 한 걸음을 내딛어 나간다는 백척간두 진일보의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올라가는 길은 있어도 내려오는 길이 없는 30미터 높은 전봇대 위에서, 한 걸음을 허공으로 내딛어 나간다는 이 말의 의미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필요한 행동철학으로, 해야 하는 지혜와 용기와 실천의 가르침이다.

부연하면, 다른 한편으로 이걸 뒤집으면,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던 일을 이룬 후, 즉 깨달았다는 깨달음에 이른 후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 무엇을 어찌해야 하느냐는 물음이며,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이루고 싶은 것을 다 이루고,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진 후, 그런 후 무엇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러주고 있는 깨우침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강을 건넌 나그네가 자신이 건넌 나룻배를 강가에 버리고 가듯, 진실로 깨달았다는 깨달음 그것마저도 버리고 나가라는 진리의 가르침이며, 대대로 부처와 보살들은 물론 선지자들이 인연을 따라 얽히고설키는 생멸의 윤회를 초월하는 무위(無爲)의 묘법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어영부영  부질없는 생을 살아서, 봉산 허허당에서 날마다 봉산을 오르내리며 생의 마지막을 준비를 하고 있는 지금, 굳이 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재미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내 인생에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이것이 의미이고 재미였다고, 이것이 있어 다행이었다고, 이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재미없고 심심했을 거라고, 지금처럼 살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말할 것이다.

게재한 사진은, 지난 1년 동안 섬진강과 봉산 사이에서,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내가 몸과 마음을 쉬면서 쉼터로 삼았던, 구례읍 오거리 카페 허밍 이미숙 여사님이 인생도전으로 배우고 있는 자수(刺繡) 작품이다.

지난 봄부터 오가며 볼 때마다, 과연 가능할지 어떤 수를 놓을지 궁금했었는데, 틈틈이 마음을 다한 한 땀 한 땀이 청록색 연잎으로 드러나고 있는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내가 날마다 내걷는 한 걸음과 여사님이 날마다 수를 놓고 있는 한 땀 한 땀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해질 무렵 멀리 서울에서 핸드폰을 머리에 이고 걸어보니, 몸의 자세가 저절로 잡히는 등, 효과가 놀랍다며 전화를 주신 지인은 물론 (내 느낌이지만) 새벽마다 절박한 마음으로 봉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한마디는, 간절하고 절박한 그 마음을 따라 가라는 것이다.

어차피 살아서 살아야 하는 재미없는 인생이지만, 포기하지 말고 스스로 일으킨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을 따라 가되 가거든 그 마음마저 버리라는 것이다.

어려울 것 없다. 백척간두(百尺竿頭)하거든, 즉 바라는 것을 이루거든, 그 순간 바로 진일보(進一步)하여, 그것마저 버리는 한 걸음을 내딛어 나가라는 것이다.

날마다 동이 트는 새벽이면, 간절한 마음으로 한 걸음을 내딛어 봉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정상에 오른 후에는 아무런 미련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하산하여 집으로 돌아가듯이......

문(門)이 없는 문 허허당(虛虛堂)에서

2023년 7월 7일 박혜범(朴慧梵)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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