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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오정희 작가의 '새'에서 보는 아이들을 위한 어른의 책임과 의무

[문학칼럼] 오정희 작가의 '새'에서 보는 아이들을 위한 어른의 책임과 의무

  • 기자명 서울시정일보
  • 입력 2022.11.03 08:05
  • 수정 2022.11.03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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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아픔을 조금씩이라도 나누고 공유하는 세상
스스로부터 세상의 그늘에 대해 아파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

민병식 칼럼니스트
            민병식 칼럼니스트

[서울시정일보 민병식 논설위원]  작가 특유의 묘사와 문장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대형 작가로서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래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1982년 ‘동경’으로 제15회 동인문학상, 1996년 ‘구부러진 길 저쪽’으로 오영수문학상, 1996년 ‘불꽃놀이’로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한 오정희는(1947~)의 작품 중 새라는 장편소설로 2003년 독일어로 번역 출간, 독일에서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하였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불우한 환경에 처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썼다고 하는데 그 당시 작가는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듯 참담한 실패를 느꼈다고 한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하얀 종이 같은 아이들의 마음을 우리 어른들은 어떤 상처로 물들였을까 참회하고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5학년 우미와 3학년인 우일이는 엄마가 집을 나가는 바람에 외할머니 댁과 종이 인형처럼 가만있어도 미쳐버리겠다고 하는 외삼촌 집을 거쳐 두 남매 때문에 미쳐 버릴거라고 말하는 큰집에 맡겨져 살게 된다. 아빠는 돈을 벌기 위해 먼 지방으로 떠났는데 어느 날 아빠가 큰집으로 우미와 우일이를 데리러 오고, 낯선 지방으로 떠나 살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는 새엄마가 있었다. 그러나 새엄마도 집을 나가버리고 아빠도 공사장에서 일한다며 드문드문 찾아오다가 나중에는 아예 연락마저 없다.

​이제 우미와 우일은 둘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우미는 결국 동생을 돌보아야 하는 소녀가장이 되었다.

"나는 그 여자가 벗어두고 간 앞치마를 두르고 너무 커서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고무장갑을 끼고 쌀을 씻었다. 맑은 물이 될 때까지 쌀을 씻어 밥솥에 안친 뒤 손등이 덮일락 말락 하게 물을 붓는 것,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서 밥물을 넘기지 말아야 하고 솥 밑에서 쪼작쪼작 소리가 나면 불을 한껏 줄여 뜸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안집 할머니에게서 배웠다.“

작고 약한 우일은 형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남의 집을 털 때 작은 몸으로 먼저 들어가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다가 본 새무리를 보고 놀라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그때부터 먹지도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하루 종일 말만하게 된다. 결국 우일이는 죽는다. 아이들의 문제는 꼭 물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작품에서 아이들이 돈이 없어서 하지 못했던 것은 고장난 텔레비전을 고치지 못한 것일 뿐 이웃들의 도움으로 외상을 해가며 생활을 했기에 돈 문제는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다리를 못 쓰는 딸과 그 남편, 그들을 데리고 사는 주인집 할머니, 남들의 눈을 속이지만 암암리에 소문이 난 레즈비언 부부,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넉살좋지만, 여자에게 수작질 잘 부리는 옆 방 사내. 모두 각자의 사연을 지닌 이들이 적당히 주고 적당히 동정하며 적당히 살아간다. ​

​좋은 집에 살고 있는 상담어머니가 우미를 찾아와서 맛있는 것도 사주고 이야기도 나누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상담에 그치고 만다. 오히려 우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이 ​작품의 핵심은 어머니의 부재이며 아이를 낳고 돌보지 않는 아버지의 비도덕성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이 모성의 부재는 아버지의 폭력에서 비롯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사회 시스템의 부족 등 요즘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가정폭력의 실상, 아동학대의 결과로 망가져 가는 아이들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혹자는 말한다. 이런 문제는 범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의 구성원으로써 스스로 얼마나 문제해결을 위해 참여했는지 모를 일이다. 국가가 국민의 안녕을 책임져야 하는 주체는 맞지만 모든 개인의 문제까지 다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의 구성원은 국민이고 그렇다면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람들도 많다. 더 많은 사람들이 타인의 아픔을 조금씩이라도 나누고 공유한다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점점 나아지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작품의 아이들은 벼랑 끝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부모와 친척들도 저러할진대 남에게서 부모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지 가슴이 아프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는 의무가 있다. 저렇게 힘들고 어려운 아이들에게 지지대가 되어야 하는 것도 우리 어른들의 의무가 아닌가. 국가가 어떻고 평등이 어떻고 천민자본주의가 어떻고 뛰어난 지식을 활용하여 비판하고 불평하기 전에 스스로부터 세상의 그늘에 대해 아파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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