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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섬진강에 오곡(五曲)이 있다

[섬진강칼럼] 섬진강에 오곡(五曲)이 있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2.05.0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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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섬진강 오곡(五曲)이 기술되어 있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사현실기(四賢實記) 구암사서사(龜巖祠敍事)”의 일부다.
사진 설명 : 섬진강 오곡(五曲)이 기술되어 있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사현실기(四賢實記) 구암사서사(龜巖祠敍事)”의 일부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전남 곡성군 입면 군지촌(涒池村)에 소재한 “구암사(龜巖祠)의 내력을 전해오는 청송심씨(靑松沈氏) 사현실기(四賢實記) 내용 가운데, 1799년 가을 진사 정윤길(鄭潤吉)이 기록한 당시 옥과현(玉果縣) 구암사서사(龜巖祠敍事)”에 의하면, 순자강(鶉子江)일대 십리 굽이굽이에, 오곡(五曲)이 있다하여, 지금의 섬진강에 오곡(五曲)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일곡(一曲) 호호정(皡皥亭) 이곡(二曲) 합강정(合江亭) 삼곡(三曲) 무진정(無盡亭) 사곡(四曲) 호연정(浩然亭) 오곡(五曲) 청계정(淸溪亭)이 그것이다. 

1914년 일제통독부의 행정개편으로 남원부에 예속되어 있던 옥과현이 곡성군, 순창군, 남원시, 담양군, 등으로 분할되어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의 행정 명칭으로 오곡(五曲)의 위치를 살펴보면, 구암사(龜巖祠)가 소재한 곡성군 입면 군지촌을 중심으로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일곡(一曲) 호호정(皡皥亭)은 조선 지식인 9인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 1700∼1767)가 학문에 매진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던 고택(古宅)으로, 상류 전북 순창군 풍산면 향가리(香佳里)에 있었다.(현재는 선비들이 산림에 은거하는 풍수로 보아 향가리 유원지 근처로 추정만 가능할 뿐 호호정이나 양응수 고택의 유적지를 전혀 알 길이 없다.)

양응수는 순창군 적성면 서림 출신으로 1734년 문인들의 주선으로 이곳으로 이사하여 후학을 가르치다가 1742년에 이곳에 정사(精舍)를 마련하여 후학을 가르치는 전당으로 활용하였다. 

“독서란 비유컨대 집 구경과 같다. 만약 바깥에서 집을 보고 나서 보았다고 말한다면 알 길이 없다. 모름지기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하나 보아, 방은 몇 칸이나 되고, 창문은 몇 개인지 살펴야 한다. 한 차례 보고 또 자꾸자꾸 보아서 통째로 기억나야 본 것이다.”는 양응수 선생의  독서법은 대대로 글을 읽는 선비의 귀감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바가 많다. 

이곡(二曲) 합강정(合江亭)은 임란최초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유팽로(柳彭老 1564, 2,24~1592,7,9)의 순절을 기린 곳으로 전남 곡성군 옥과면 합강리(合江里)에 있다. 

유팽로는 선조 25년 한양에서 임란발발의 비보를 듣고 낙향하다 4월 20일 순창 대동산 아래 관아 앞에서 거병(擧兵)하여, 임란 최초 의병(義兵)을 일으킨 의병장으로 고경명을 추대하여 운암전투에서 승리하여 공황상태에 빠진 임금과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정신적 반전의 계기를 제공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7월 9일 금산전투 중 적진 속에서 낙마한 고경명을 구하려다 함께 전사하였다. 

삼곡(三曲) 무진정(無盡亭)은 39세를 일기로 요절한 조선 중기의 대 문장가이며, 사랑의 화신이며 방랑의 저항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시를 짓고 읊던 곳으로, 전북 남원시 대강면 방산리에 있다.(본래 이곳은 임제의 외가(外家)이며, 임제가 자란 곳이고, 은둔하며 시를 읊던 곳이다.) 

임제는 이이·허균·양사언 등이 기기(奇氣)와 문재(文才)를 인정한 문장가이며, 이항복, 신흠 등은 그를 시단의 맹주로 받들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다음 서도병마사로 부임하여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읊은 시로 인하여, 임지에 가는 도중에 파직된 사건은 유명하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었느냐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특히 죽을 때는 자식들에게 유언에서 “사해제국(四海諸國)오랑캐들이 다 스스로를 황제라 일컫는데, 우리 조선만 자립하지 못하여 제국이 못 되었다. 이런 나라에서 살다 가는데, 그 죽음이 어찌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 곡하지 말라”는 유명한 임종시 ‘물곡사(勿哭詞)’는 성호이익 선생의 성호사설과 대동소학 선행편에 수록되어 후학들에 교재가 되었다. 

사곡(四曲) 호연정(浩然亭)은 구암사(龜巖祠)가 있는 중요 민속 문화재 제 155호이며, 청송심씨 제호정(霽湖亭) 심광형(沈光亨)이, 조선 중종 30년인 1535년에 지은 군지촌정사(君池村精舍)에 속한 부속 건물로, 1543년(중종 38년)에 건립한 정자이며, 심민각(沈民覺 1589~1643)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곳으로, 전남 곡성군 입면 군지촌에 소재한 지금의 함허정(涵虛亭)이다. 

 심민각(沈民覺)은 곡성 출신으로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에 의병(義兵)과 가동(家僮) 9백 여 명을 이끌고 창기(倡起)하여, 운봉현감 황일호(黃一皓)와 함께 왕(王)을 공주에서 호종(扈從)하고, 안현(鞍峴)전투에서 승전을 거두니, 왕이 그 공(功)을 포상(褒賞)하여 청안현감(淸安縣監)과 증산현감(甑山縣監)을 제수하였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선생은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호서지방(湖西地方)을 지키면서, 강화도에 물자를 공급했으며, 상소하여 화친(和親)을 반대하였다. 

난후(亂後) 영유현령(永柔縣令)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강가 구암(龜巖)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유명(遺命)으로 병자(丙子) 후의 관직을 쓰지 못하도록 가족에게 당부한 충신이며 선비였다. 

오곡(五曲) 청계정(淸溪亭)은 청계정사(淸溪精舍)가 있던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전사한 충장공(忠壯公) 양대박(梁大撲 1544~1592) 장군이 호연지기를 하던 청계동천(靑溪洞天) 중앙에 자리한 전남 곡성군 곡성읍 신기리 사수곡(泗水谷) 입구를 말하는데, 안타깝게도 전해오는 청계정은 무지하고 부패한 곡성군의 부분별한 파괴로 유적의 흔적조차 없어져버렸다. 

참고로 청계동천은 청계정이 있는 사수곡을 중심으로, 흐르는 섬진강을 말하는 것으로, 상류 어량(魚梁)이 있는 우암(牛巖)여울로부터 상청(上靑) 중청(中靑) 하청(下靑)으로 되어 있다. 

알기 쉽게 상류 어량(魚梁)이 있는 우암(牛巖)여울에서, 하류 섬진강 철교까지, 푸른 강물이 높고 험한 협곡을 지나오는 구간을 말한다. 

양대박은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담양으로 가서 고경명(高敬命)을 만나 맹주로 추대하고, 북상하여 5월에는 전주에서 의병 2천 명을 모았다. 고경명과 함께 금산으로 갔는데, 고경명은 금산에서 왜적을 맞아 싸웠고 양대박은 아들 양경우(梁慶遇)와 함께 진산(珍山)을 지키는 도중에 의병을 모을 때의 피로로 진중(陣中)에서 병을 얻어 진산에서 죽고 말았다. 당시 장군의 나이는 49세였다. 

사후 204년이 지난 뒤, 1796년 8월 9일 정조(正祖)는 장군을 일러 “이 사람이 의(義)를 부르짖은 것은 증 영상(領相) 고경명(高敬命)보다 앞서고, 그 용단(勇斷)은 충무공 이순신보다도 뛰어났으며, 자기 몸을 던져 충성을 바친 것은, 이 두 사람과 같았다. 유집(遺集)을 한 번 보니, 빼어난 바가 드러나, 마치 말을 올라타서는 적을 토벌하고 말에서 내려서는 격문을 짓던 그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며 극찬한 사례에서 보듯이, 양대박 장군이 임란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1523~1589) 백록(白鹿) 신응시(辛應時1532~1585) 제봉(霽峰) 고경명(1533~1592) 청계(靑溪) 양대박(梁大撲 1543~1592) 등등 저명한 충신열사들과 문인들의 시가 남원 용성지에 전하여 오고 있다. 

여기까지가 구암사 내력을 전하는 사현실기에 기록된 섬진강 오곡(五曲)의 위치와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그 유적들의 존재 유무를 확인한 것이다. 

일곡(一曲) 호호정(皡皥亭), 이곡(二曲) 합강정(合江亭), 삼곡(三曲) 무진정(無盡亭), 사곡(四曲) 호연정(浩然亭), 오곡(五曲) 청계정(淸溪亭)의 오곡과, 이 속에 깃들어 있는 양응수(楊應秀1700∼1767) 유팽로(柳彭老1564~1592) 임제(林悌1549~1587) 심민각(沈民覺1589~1643) 양대박(梁大撲 1544~1592) 5인의 면면들은 그동안 섬진강이 잃어버리고 있었던 진면목을 찾은 것이며, 온전한 섬진강의 기개와 정신을 비로소 대면하는 것으로, 역사적 문화적으로 참으로 소중한 자료다. 

여기에다 일곡(一曲) 호호정(皡皥亭)의 상류에 있는 의병장 유팽로가 임진왜란이 발발했다는 비보를 듣고 낙향하다 4월 20일 전국 최초로 거병하여 의병을 일으킨 순창읍 대동산 아래 관아에서부터, 남원시의 만인의총과, 오곡(五曲) 청계정(淸溪亭)의 하류 곡성군 고달면 섬진강변에 자리한 세조 때 김계보(金季甫)가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었고, 신말주 김인후 송순 정철등이 머무르며 시를 읊은 오대정(鰲戴亭)을 거쳐, 1597년 11월 재침하는 왜적을 맞아 의병과 승병들이 맨주먹으로 싸워 시산혈해를 이루며,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는 그리하여 오늘날 피아골의 이름을 전설로 남긴 구례군 토지면의 석주관(石柱關)과,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장군이 노량해전에서 패주하는 적들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추격하다 끝내 유탄에 전사하여, 이락파(李落波)라는 한의 바다가 된 섬진강이 바다로 드는 남해군까지, 섬진강 시원에서 바다까지, 가슴 절절한 역사의 현장과 인물들을 하나로 이어보면, 섬진강의 지정학적 가치가 무엇이고, 이순신장군이 그토록 간절히 지키려고 했었던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의 진면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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