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섬진강칼럼] 대승사상의 꽃 정치는 화이고 화는 화쟁이고 화쟁은 최고 최상의 정치기술이다

[섬진강칼럼] 대승사상의 꽃 정치는 화이고 화는 화쟁이고 화쟁은 최고 최상의 정치기술이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2.04.04 08:44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날마다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이 계곡물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즉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을 보면, 그 자체가 화(和)이고
날마다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이 계곡물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즉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을 보면, 그 자체가 화(和)이고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먼저 일러둘 말은, 다음의 내용은 지난 3월 7일 게재한 “화(和)는 정치의 바탕이며 완성이고, 더 좋은 미래로 나가는 시작이다” 제하의 글에서 언급했던, 우리 민족 정신문화인 화사상(和思想)의 바탕이 된 불교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하는 글이다.

본문은 전래하는 도참사상(圖讖思想)과 원효대사에서 시작하여 혜철국사와 도선국사로 이어지고 있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사상을 연구하고 있는 촌부 나름의 주장이며 해석임을 밝히니, (학계에서 검증 공인된 학설이 아니라는 뜻임) 이 점을 참고하여 읽기를 바라며, 혹 견해가 다르다면 다만 다름으로 이해를 할뿐, 특별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석가 공자 예수 이들 지구촌 3대 성인들이 생전에 앞장서서 실천하며, 세상을 깨우쳤던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경전의 내용을 한 글자로 정의하면 화(和)이고, 이걸 두 글자로 확대하면 불교는 화쟁(和諍)이고, 기독교는 화평(和平)이고, 유교는 인화(人和)다.

이 화(和)를 통하여 작게는 내가 내 몸과 마음을 화평(和平)하게 하면서, 나와 내 가족과 이웃들과 사회와 나라는 물론 모든 인류와 국제사회는 공동의 평화(平和)를 추구하고, 그리하여 도달하는 분별도 없고 차별도 없는 평화로운 화평한 세상이, 비로소 좋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화쟁(和諍)과 기독교의 화평(和平)과 유교의 인화(人和) 이들 셋이 가지는 의미와 방법과 완성의 차이가 어떻게 다른지 그 다름을 따져보면, 기독교의 화평(和平)과 유교의 인화(人和)는 사람과 세상이 동시에 화(和)를 이루는 것이 목적이며 완성이고 전부다.

그러나 불교의 화쟁(和諍)은 언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쉼 없는 노력 끝에 비로소 맞이하는 목적하는 좋은 세상인 화(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끝도 아니며, 다시 보다 더 좋은 세상으로 발전하여 나가는 시작의 가르침이며, 실천의 방법론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사람과 세상을 동시에 구하는 대승사상(大乘思想)의 꽃인 정치로 나름의 차이를 설명을 하면, 기독교의 화평(和平)은 말 그대로 화평한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유교의 인화(人和)는 국가의 구성원들이 서로 화합해야 한다는 것으로, 전제된 도달해야 할 화(和)의 세상만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면........

부연하면, 이들 경전 자체에 화(和)를 실천하기 위한 수많은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압축 강조되고 있는 화평(和平)과 인화(人和) 자체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는 것이니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인 화사상(和思想)이 된 불교의 화쟁(和諍)은 전제되고 도달해야 하는 세상의 화(和)를 위하여, 국가 구성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화(和)는 사람과 환경과 시대는 물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변화이며, 과정이고 발전의 방법론임을 알 수가 있고, 그것을 직접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화쟁은 사람과 세상을 동시에 구하는 대승사상을 구현하는 방법론이고, 대승사상이 피워내는 꽃이 정치이고,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의 목적은 화(和)이고, 화는 화쟁(和諍)이니, 화쟁은 사람이 구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최고 최상의 정치기술이며, 이것으로 “모든 중생들은 물론 나와 남이 일시에 깨달아 이루는 부처님의 세상 즉 화(和)의 세상으로 나가는 원공법계 제중생(願共法界 諸衆生)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 成佛道)를 실천하는 법(法)이며 도(道)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화쟁(和諍)에서 화(和)는, 일정하게 이것이 이것이라고 정해지고 고정된 상(相)이 없으므로, 형체가 없으면서 동시에 쉼 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 본질이다.

그러므로 설명을 하면,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여 조화를 이루는 화합할 화(和)는, 항상 시대와 사람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는 것으로, 언제 어디서나 또는 어떤 관계에서나, ①쉼 없는 시간이고, ②쉼 없이 변화하는 공간이며, ③쉼 없이 흘러가는 물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공간의 의미는 하늘 우주 또는 삶의 공간으로 이해하면 됨.)

쟁(諍)의 사전적 의미는 잘못된 것을 간(諫)하여 바로 잡아 고치고, 말로 다투는 토론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형체가 없는 무상한 화(和)를, 사람이 현실에서 구현하는 가르침으로 ①쉼 없는 시간이라 한다면 쉼 없는 그 시간 속에서 보다 더 좋은 화(和)의 시간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며, ②쉼 없이 변화하는 공간이라 한다면 그 공간의 속에서 보다 더 좋은 화(和)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③쉼 없이 흘러가는 물이라 한다면, 서로 앞을 다투지 않고 한순간 찰나의 머무름도 없이, 보다 더 낮은 곳으로 흘러 화(和)를 이루는, 방법론이고 과정이며 실천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된다.

결론을 지으면, 본질인 시대와 사람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는 형체가 없는 화(和)와 이 화(和)를 사람이 실천하여 구현하는 방법론이며 과정인 쟁(諍)이 하나로 합하여 화쟁(和諍)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여 나가는 진리의 가르침과, 그것을 바로 지금 현실에서 끊임없이 실천하여 이루어 나가는 방법론, 이 둘을 합한 것이 화쟁(和諍)이다.

뭐 복잡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창한 것도 아니다. 우주의 본질 즉 자연이다. 그러므로 진리인 정해진 형체가 없는 무상한 화(和)는, 내가 내 마음을 편안케 하는 것이며, 우리들을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세상을 화평하게 하는 것이고, 실천의 방법이며 과정인 쟁(諍)은, 우리네 사람의 일이고, 사람이 끊임없이 추구하며 해결해야 하는 과정이며 풀어내야 하는 문제다. 그것도 날마다 매 순간마다 당면하고 있는 문제풀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마다 또는 집단마다 또는 국가마다 추구하는 화(和)가 다르고, 그것을 실천하여 구현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이 화(和)를 깨뜨리는 다툼의 불화(不和)가 되는 것인데.....

화쟁(和諍)에서 화(和)와 쟁(諍)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며 공통점은, 불화(不和)를 단호히 배격하여 도태시키고, 목적하는 서로가 상생하는 긍정의 화(和)를 향하여,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여 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화쟁(和諍)은 사람과 시대와 환경에 따라 또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발생하는 서로 다른 화합하지 못하는 대립과 충돌의 불화(不和)를 단호히 버리고, 다 같이 인정하며 공생하는 보다 더 좋은 화(和)를 구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말로 건의하고 토론하며, 저마다 가지는 독선과 생각을 뛰어넘어, 보다 더 좋은 화(和)로 나가는 방법을 강구하는 진리의 가르침이며 실천의 가르침이다.

문제는 진리인 정해진 형체가 없는 무상한 화(和)는 우주의 본질 즉 쉼 없이 변화하는 자연이고, 실천의 방법이며 과정인 쟁(諍)은, 온전히 우리네 사람의 일이므로, 사람이 끊임없이 추구하며 해결해야 하는 사람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게재한 사진은, 크고 작은 수많은 바위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들 사이를 거침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지리산 화엄사 계곡물이다.

온통 돌과 바위뿐인 골짜기를, 찰나의 망설임도 없고 머무름도 없이,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물이 화(和)이며 쟁(諍)이고, 날마다 한순간의 머무름도 없이 쉼 없이 화쟁(和諍)을 실천하며 설법하고 있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부처님이고, 경전이라고 한다면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날마다 쉼 없이 흘러내리고 있는, 이 계곡물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즉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에서 보면, 그리고 바로 지금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당면하고 있는 모든 유형무형의 것들을 보면, 그 자체가 화(和)이고, 모든 것이, 모든 순간이, 다시 또 보다 더 좋은 화(和)를 향하여, 쉼 없이 변화하여 나가는 쟁(諍)의 과정이며 때이듯, 바로 지금 찰나의 머무름도 없이 쉼 없이 흘러가고 있는 물처럼, 우리들이 쉼 없이 추구하며 실천하여 구현해야 하는 것이 화쟁(和諍)이라는 의미다.

끝으로 이 화쟁(和諍)의 근원과 실천의 방법론을 법화경에서 찾아보면, 각각의 다른 셋이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으로 피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며, 하나의 진리로 나가는 삼승일(三乘一乘)이고, 화엄경에서 찾아보면 화엄일승(華嚴一乘)이고, 금강경에서 찾아보면, 마땅히 머무를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며,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이라고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