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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밥을 먹는 식탁이 마음을 깨닫는 최고의 자리다

[섬진강칼럼] 밥을 먹는 식탁이 마음을 깨닫는 최고의 자리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2.2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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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바닥 어물전 비린내를 풍기는 아주머니가 깨달으며 그가 곧 부처이고, 그가 서 있는 자리 즉 어물전 좌판이 법당이 되는 것이고, 만약 택시기사가 깨달으면, 그가 곧 부처이고 택시는 움직이는 법당이 되는 것이라, 언제 어디서 어떠한 직업을 가진 누구일지라도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으면 그가 부처이고, 그 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임을 깨우치는 가르침

사진 설명 : 우리 시대의 작가 김만근 선생의 작품 “바람으로부터”다.
사진 설명 : 우리 시대의 작가 김만근 선생의 작품 “바람으로부터”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날마다 허공에서 끊임없이 일었다 사라지는 헤아릴 수 없이 크고 작은 수많은 바람은 형상이 없는 무형의 에너지이고, 형상이 없는 그 바람의 존재를 깨달아 아는 배움이라는 것은, 나타나는 현상인 형상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며 체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날 한 시에 부는 바람일지라도, 동서남북에 따라 다르고, 산과 들에 따라 다르고, 배 위에서 노를 젓는 사공이 느끼는 바람이 다르고, 도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느끼는 바람이 다르다.

한마디로 한 날 한 시에 일어나는 형체가 없는 이 무형의 에너지인 바람은 변함이 없는데, 지형 조건에 따른 환경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동일한 공간이라 하여도 사람마다 다르게 체감되는 것이 이 바람의 실체다.

그리고 우리네 사람들은, 형상이 없는 에너지인 무형의 바람이, 형상이 있는 사물을 통해서 나타나는 현상인 형상을 통해서, 바람의 세기는 물론 바람의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그럼 사람은 바람을 통해서 형상을 깨달아 아는 것인가? 아니면 나타난 현상인 형상을 통해서 바람을 아느냐는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낸 사람이 저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으로 저잣거리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마음의 법을 설한 육조(六祖) 혜능(慧能 638∼713)대사다.

법성사(法性寺)에서 법회가 있음을 알리기 위해, 깃대에 높이 달아놓은 깃발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주장과,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다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닌, 그대들 각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 하여, 대립하던 두 사람을 그 자리에서 동시에 승복시키고, 천하를 바른 길로 이끌었던 혜능대사의 답변은 무형의 존재인 마음의 실체를 명쾌하게 밝히고 어떻게 작용되는 것이며 어떻게 운영하고 응용하는 것인지를 깨우친 모범 답안이다.

이 풍번문답에 나오는 바람과 깃발을, 주변에서 흔하게 보는, 형상이 없는 무형의 바람과 형상인 흔들리고 있는 아름다운 꽃으로 바꾸어 정리하면, 형체가 없는 무형인 바람의 관점에서 보면, 형상인 흔들리고 있는 아름다운 꽃은 바람의 실체가 아니며, 흔들리고 있는 형상인 아름다운 꽃의 관점에서 보면, 형상이 없는 무형의 바람은 꽃의 근본이 아님을 직시하고 있는 실상법이다.

촌부의 설명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쉽게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고 있으며 성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겪어보았을 사랑의 기쁨과 아픔이 실체가 있는 것인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만약 사랑을 실체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쁜 것인가? 아니면 아픈 것인가? 그리고 사랑을 기쁜 것이라 한다면, 또는 아픈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느끼는 실체 즉 주인이 누인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촌부가 전하는 마음을 찾아 깨닫는 공부의 비법”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말한 “마음은 안에 있고 그것을 찾아 깨닫는 공부는 밖에서 하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은, 이른바 잘못된 오답을 통해서, 바른 정답을 손쉽게 찾는 촌부 나름의 방법을 제시한 것일 뿐, 분별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른바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마음이 아니고,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 붙인 이름일 뿐 실체가 아니며, 마음을 찾아 마음을 깨닫는 공부라는 것 또한, 마음을 깨우치는 방법에 이름을 붙인 것뿐인데, 이를 어찌 둘이라고 하겠는가?

형상이 없는 무형의 바람과 흔들리고 있는 형상인 아름다운 꽃의 관계가 그러하듯, 형상이 없는 무형의 마음과 그 마음을 찾아 깨닫는 형상인 배움이 둘이 될 수 없고, 안에 있는 것과 밖의 일로 구분하고 분별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이른바 마음의 실체를 찾아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며 발원하고 나선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마음에서 일으킨 마음의 일이고, 배움이라는 것 또한 마음으로 배워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떠난 마음 밖에서는 억겁이 지나도 찾을 수가 없는 일인데, 정작 사람들은 마음 밖에서 마음을 찾고 구하려 갖은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라? 이러한 잘못된 착각 속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을 옛 선사들의 마음이 어떠했을 지를.....

비록 자신의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청하러 멀리서 찾아오는 승려들이지만,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마음을 찾아 깨달기 위해, 날마다 그 멀고 먼 길을 걸어 찾아드는 한심한 승려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잘못된 이른바 마음을 찾아 깨닫는 공부를 하는 방법을 올바로 제시하여 깨우쳐주는 대표적인 옛 조사들의 가르침이, 마음밖에 다른 법은 없다는 심외무법(心外無法)과 사람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며, 임제선사가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또한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석가모니부처님과 조사들이 대대로 전하고 있는, 마음밖에 다른 법은 없다는 심외무법(心外無法)과, 사람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은, 마음을 깨닫는 이가 곧 부처이고,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임을 천명하는 것으로, 이는 다만 깨달음이 있을 뿐, 깨닫는 법당과 선방이 따로 없으며, 공부하기 좋은 날이 따로 있을 수 없고, 공부하는 방법 또한 따로 없음을 직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시장바닥 어물전 비린내를 풍기는 아주머니가 깨달으며 그가 곧 부처이고, 그가 서 있는 자리 즉 어물전 좌판이 법당이 되는 것이고, 만약 택시기사가 깨달으면, 그가 곧 부처이고 택시는 움직이는 법당이 되는 것이라, 언제 어디서 어떠한 직업을 가진 누구일지라도 마음이 부처임을 깨달으면 그가 부처이고, 그 자리가 곧 진리의 자리임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사설이 길었다. 이른바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 마음을 찾아 깨닫는 방법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별 것 아니다. 날마다 밥을 먹는 식탁이 그렇다한다면, 마음을 깨닫는 최고의 자리 명당이라 한다면 믿겠는가?

밥이든 반찬이든 맵다 짜다 싱겁다 또는 맛이 있다 없다고 느끼고 판단하는 그 실체 즉 주인이 누구인가? 이른바 입안의 혀인가 그걸 먹고 있는 사람의 마음인가를 생각해 보면, 밥을 먹는 식탁이 마음을 깨닫는 최고의 자리 명당이라는 촌부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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