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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촌부가 해석하는 진리로 드는 문 수처작주(隨處作主)

[섬진강칼럼] 촌부가 해석하는 진리로 드는 문 수처작주(隨處作主)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2.2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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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고 급변하는 삶의 현실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부딪히고 병이된 소화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다툼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고 신속하게 살리는 명약이 이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사실.

사진 설명 : 강변 길가 전봇대 변압기에다 집을 짓고 있는 까치의 모습이다.
사진 설명 : 강변 길가 전봇대 변압기에다 집을 짓고 있는 까치의 모습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처음 자궁에서 사람이 생기는 과정에서 뜻을 찾는다면, 몸이 먼저 생기고 마음이 따라 생긴 것인가? 아니면 마음이 먼저 생기고 몸이 따라 생긴 것인가?

사람이 여행을 하는 일에서 뜻을 찾는다면, 몸을 따라서 마음이 함께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따라 몸이 함께 따라 여행을 하는 것인가?

사람이 사는 일에서 뜻을 찾는다면, 몸을 따라 마음이 함께 따라 사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따라 몸이 함께 따라 사는 것인가?

이렇듯 사람이 처음 생겨나고, 태어나서는 곳곳마다 어디든 여행을 하고, 한평생 인생을 살아가는 일들이 그렇다 한다면, 그럼 이러한 존재의 주인은 누구인가? 이른바 몸이 주인인가? 마음이 주인인가?

10여 년 전 사업을 크게 실패하고 방황하다, 방송으로 유명한 어느 승려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항상 주인이라는 의식을 갖고, 그곳에서 그 일에서 주인이 되라며 인용했다는, 저 유명한 임제선사(臨濟禪師,?~867)의 가르침인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듣고, 그 네 글자를 회사 사무실 벽에 걸어놓고, 열심히 노력해서 재기에 성공했다며, 이따금 사람들에게 경험과 자랑을 삼아 이야기하던 지인이, 지난 연말 갑자기 쓰러져 고인이 돼버렸다는 가슴 아픈 비보를 들었다.

짐작컨대 그의 신념이며 사업을 성공시켜주는 주문(呪文)이 돼버린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날마다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는 과중한 일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쓰려져버린 것 같은데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오래전 그에게 수처작주에 대하여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려다, 방송으로 유명한 그 승려를 철석같이 믿고, 그가 쓴 책을 보물처럼 지니고 있는 그에게, 촌부의 말이 먹히지도 않았지만, 나 역시 굳이 재기에 성공하여 좋아하는 그에게 그럴 것 없다싶어, 가끔 그가 와서 자랑삼아 이야기 할 때면, “그렇게 싸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자랑을 하고 다니는 그놈이 누구인지를 아는 날이 있을 것”이라며 웃고 말았는데......

그가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승속을 떠나 뭔가를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는 수처작주(隨處作主)가 진실로 임제선사가 이야기한 그 뜻에 부합하고 있는 것인지 종일 다시 생각해보지만, 모두 다 본질을 착각 오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주 오래전 고인이 돼버린 임제선사(?~867)를 찾아가 당신이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의 본뜻이 뭐냐고 물어볼 방도가 없는 이상, 사람마다 이 수처작주(隨處作主)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다행한 것은 계곡을 거슬러 원천인 옹달샘을 찾아가 물맛을 직접 느껴보듯, 배우는 마음으로 이 문장이 나오는 어록의 전문을 읽어보면.... 

수처작주(隨處作主)는 육조(六祖) 혜능(慧能)대사가 깨달은 저 유명한 금강경(金剛經) 제10(第十)의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청산 맑은 숲속 옹달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임제선사를 만나 또 다른 이름이 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이것으로 선사가 말한 수처작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문제는 본질을 깨우치는 수처작주라는 물이 임제선사의 산문을 벗어나 저잣거리로 나온 순간,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되어 사람들에게 독단과 독선을 가지게 하면서, 일등 제일주의를 부추기는 독극물이 되어, 본래의 진면목인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세속의 처세술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시간과 공간인 이 수처(隨處)를 이르는 장소나 머무는 곳 물리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순간, 뒤에 따라오는 작주(作主)는 자동으로 왜곡되어, 임제선사가 바란 본래의 목적인 사람을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세속의 처세술이 돼버렸고, 지난 연말 사람이 죽어 고인이 돼버린 사건에서 보듯, 사람들을 죽이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독이 돼버린다는 말이다. 

마치 강물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임제선사의 수처작주를 언제 어디서든 주인 의식을 갖고 주관적인 삶을 살라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받아들인 결과 “여기는 내가 주인이다.” 또는 “우리가 주인이다.”는 등등의 주장으로 생을 살면서, 스스로 탐욕으로 찌들고 경쟁으로 지새는 이른바 괴물이 돼버렸다.

부연하면 이것을 사람을 깨우치고 세상을 구하는 불교 본래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수처작주가 오늘 한국 불교가 퇴락하고 승속을 함께 타락시켜버린 원인이다.

안타까움에 글을 쓰다 보니 쓸데없는 난설(亂說)이 돼버렸는데, 오늘 촌부가 이야기하는 수처작주가 어설픈 개똥이다 하여도, 분명한 것은 복잡하고 급변하는 삶의 현실을 살아내는 과정에서, 부딪히고 병이된 소화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다툼과 스트레스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고 신속하게 살리는 명약이 이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자고나면 발전하는 과학문명에서 소외되는 인간들과 인간 세상을 효과적으로 구하는 것은, 특히 지금과 같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몸과 마음까지 고립되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속에서 드러난 몸이라는 현상을 통해서 마음의 작용과 실체를 깨달고, 경계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이 수처작주(隨處作主)를 바르게 해석하고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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