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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바둑으로 보는 윤석열과 최재형의 결정적인 패착 수

[섬진강칼럼] 바둑으로 보는 윤석열과 최재형의 결정적인 패착 수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8.1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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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태풍이 몰고 온 먹구름이 만든 기묘한 장면이다.
사진 설명 : 태풍이 몰고 온 먹구름이 만든 기묘한 장면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나는 평소 혼자서 보는 바둑TV를 즐긴다. 내가 바둑TV를 즐기게 된 계기는, 실력이 있건 없건, 흔히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두는 동네 바둑이든, 또는 읍내 기원에서 두는 바둑이든, 한마디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여도 사람을 상대하는 바둑은 승패를 다투는 시비와 분별이 있어, 바둑 고유의 맛을 즐길 수 없지만, 혼자서 관전하며 감상하는 TV바둑은, 말 그대로 마음으로 보면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까닭에, 사람을 상대로 바둑을 두지는 않지만 바둑TV는 즐겨본다.

무엇보다도 TV바둑은 오래전 전복사고의 후유증으로 시도 때도 없이 겪고 있는 육신의 아픔과 고통을 견디며 극복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살면서 이따금 내 스스로 일으킨 생각 속에서, 얽혀버린 내 생각들을 정리할 때, 또는 소위 열 받은 머리를 식힐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번 삼복에 겪은 코로나 격리기간을 보내는 2주 동안 바둑TV는 답답함을 잊게 하는 좋은 벗이었다.

그렇다고 실전 바둑을 잘 두느냐하면 그건 아니다. 바둑에 대하여 검은 돌과 흰 돌을 겨우 구분하여 아는 정도일 뿐, 바둑을 잘 두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옛날 우리들이 마을에서 흔히 보았던, 바둑을 두는 사람의 옆에 앉아 관전하면서 훈수를 둘만큼의 실력도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이기고 지는 승패로 가르는 실력이 아니고, 바둑을 이해하는 철학에 방점을 둔다면, 한국 바둑계의 정점에 있는 신진서와 박정환 변상일 등등 고수들이 두는 대국을 관전하면서 이해하는 정도는 된다.

뭐 그렇다고 밥 때를 잊을 정도로 몰입하거나, 특정인의 바둑에 매료되어 빠지는 광팬은 아니다. 바둑은 그 자체가 어떠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의미가 없고, 사소한 반칙이나 조그마한 부정도 개입될 수 없는 아주 깨끗한 게임이기에 편하게 보면서, 누가 이기고 지든 별 상관은 없지만, 남녀를 불문하고 가능한 한 살이라도 나이 어린 신인들이 기존의 쟁쟁한 고수들을 이기고 발전하여 가기를 바라며 관전하는 것이 촌부의 방식이다.

덧붙이면, 며칠 전 신진서의 역전승으로 끝난 명인전 결승 3국을 포함하여, 예를 들어 여류바둑의 계보를 잇고 있는 조혜연과 최정이 붙는 등,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대국은 챙겨보는 편이며, 금년에 벌어진 모든 국내외 결승전을 시청하였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이다.

바둑을 즐겁게 관전하는 조언을 하나 소개하면, 제아무리 천하의 고수라하여도, 대국에 임하는 사람이 승패에 따라 일으키는 개인적인 감정이 바둑판에 이입되는데.....

승패에 따라 일어나는 자신의 심기를 그대로 노출시키는 대국자가 있는 반면, 대부분은 자신의 심기를 감춘다며 태연한 몸짓으로 바둑을 두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표정과 바둑돌을 놓는 소리에서 다 드러내는데, 그걸 함께 관전하며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밌다.

방식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부처라는 이창호를 비롯하여 이세돌 박정환 신진서 등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바둑의 계보를 잇고 있는 고수들 모두 승패에 따라 드러내는 특유의 취향들이 있다.

굳이 인생 백 년이 한 판의 바둑과 같다며, 사람의 인생을 바둑에 비유한 매월당 김시습 선생의 탄식이 아니더라도, 그동안 TV바둑을 시청하면서 나름 배운 것이 있다면 승패를 가르는 바둑판의 철학이다.

실력의 차가 이미 확연한 하수와 고수 둘이서 두는 바둑은 의미가 없어 비유가 불가하지만, 같은 동급들의 경우 특히 정 사각 안에 그려진 361개의 점에 삼라만상의 변화를 담고 있는 바둑판에서, 한 점의 돌을 던져 거친 파란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 고요한 바둑판에 조용히 던진 한 점의 점을 시작으로 선과 선들을 이어가는 무궁한 변화를 일으켜가며 승패를 가르는 고수들이 두는 바둑은, 그 자체가 생생한 실상을 풀어내는 이른바 수시변역(隨時變易)의 묘법으로 언제나 나를 매료시킨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바둑기전(각종 국내외대회)은 천시(天時) 즉 하늘이 주는 기회이고, 바둑판은 지시(地時) 즉 땅을 아는 이로움이고, 바둑을 두는 당사자는 인시(人時) 즉 사람을 아는 일이고, 상대와 자신이 한 점의 돌을 던질 때마다, 형세가 달라지는 대국의 판세는 수시변역(隨時變易)으로, 바로 지금 당면하고 있는 실상인 수시(隨時)이니, 바둑은 수시(隨時)를 아는 것이고, 수시가 뭔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때에 맞추어 때에 맞는 점에 돌을 던지는 사람이 대국을 승리하는 게임이라는 것이 촌부의 견해다.

바둑에서 하수와 고수의 차이는 간단하다. 하수는 바둑판 전체를 보지도 못할뿐더러 상대의 수를 보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수만 둔다.

그러나 고수는 시종일관 바둑판 전체를 보면서, 상대가 두는 한 점 한 점의 돌을 보고나서, 그때마다 자신이 돌을 두어야 할 자리를 찾는다는 것, 바로 이것이 승패를 가르는 실력의 차이고, 촌부가 말하는 바로 지금 실상을 보고 행하는 수시(隨時)의 묘법이다.(천부적으로 수시변역(隨時變易)에 능통하고 특화되어 있는 사람이 신진서다.)

지금 당면한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는 국민의 희망으로 기대를 모았던 윤석열과 최재형이 추락하고 있는 것은, 검사와 판사라는 직업병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그들의 한계다.)

다시 말해서 한국이 주관하는 기전인지, 중국이 주관하는 기전인지, 기전의 성격과 대국에 임하는 상대를 보고, 기본 포석을 해야 할 바둑판에서, 기전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고 판세도 모르면서, 무조건 자신이 생각했던 바둑만을 고집하며 두고 있는 것이 윤석열과 최재형이다. (극단적인 비유를 하면 고작 알까기와 오목의 실력을 가지고, 바둑의 실력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윤석열은 검사출신들로, 최재형은 판사출신들로 대선캠프를 채워버렸는데, 이는 지금 민심이 열망하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물론 민심 자체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며 오판이다. 왜냐하면 민심은 정권교체를 바라지만 차기 정권이 이른바 정치 검사들과 정치 판사들이 판치는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둑으로 비유하면 이는 시작부터 잘못된 포석으로 윤석열과 최재형의 결정적인 자충수 판세를 회복하거나 뒤집을 수 없는 패착 수다.

최재형과 윤석열이 바둑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바둑을 알고 두어 본 경험이 있다면,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바둑판에서 바둑돌 한 개의 무게와 의미를 생각하여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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