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정일보] 가을날 대법원장과 콩을 구워 먹으며 배운 것 하나
[서울시정일보] 가을날 대법원장과 콩을 구워 먹으며 배운 것 하나
  • 박혜범 논설위원 <hmk0697@hanmail.net>
  • 승인 2019.10.13 2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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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 그 가을날 오후, 산에서 주어온 밤과 밭에서 꺾어온 콩을 구워 먹으며 만났던 그남자?

[서울시정일보] 오래된 이야기이라 하여도, 오늘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평을 받고 있는 인물인 탓에, 혹여 후손들에게 피해가 갈까 염려되어 위치를 밝힐 수는 없지만, 1970년대 중반 그러니까 대략 45년 전 서울 근교에 살던 1974년 가을 어느 날로 기억되는 일이다.

오늘처럼 화창한 가을 일요일이라고 해봤자, 본래가 산골에서 자라난 촌놈인 탓에, 그 시절 온 나라 극장가를 휩쓸며 유행하는 가수들의 리사이틀에도 흥미가 없다보니, 딱히 갈 곳도 없는 심심한 오후였다.

70년대 당시 서울 인근이라 하여도, 사실상 산골이었던 탓에, 함께 지내는 친구와 집 곁에 있는 동산에 올라가 주인 없는 산밤을 주어다, 마른 솔가지로 모닥불을 지펴 구워 먹으면서, 공터 옆에 있는 주인댁 밭에서, 이제 막 여물은 콩도 몇 포기를 꺾어 잘 구워서 막 먹으려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낮 익은 어른 한 분이 다가와서, 냄새가 구수하니 참 좋다며, 자리를 같이 해도 좋겠냐고 물었다.

시골에서는 어른과 애들이 둘러 앉아, 밤이나 콩 등을 구워 먹는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일이라, 별 생각 없이 그러시라며 자리를 내어드린 후, 둘러앉아서 불에 구워진 밤과 콩을 맛있게 먹었다.

그때 대충 본 점잖은 어른은 아버지뻘의 연세였기에, 친구와 나는 불에 잘 구워진 밤과 콩을 먼저 드시라며 대접하여 드렸고, 점잖은 어른은 어려서 먹던 별미를 맛본다며 정말 맛있게 드셨다.

나와 친구는 물론 점잖은 어른의 입 주변이 까맣게 되도록, 그렇게 가을 오후 한나절의 별미를 허물없이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잘 차려 입은 신사를 대동하고 나타난 옆집 아주머니가 “대법원장님 얼굴이 너무 흉하다.”며 놀라는 목소리에, 정작 깜짝 놀란 건 나와 친구였다.(옆집 아주머니는 대법원장의 따님이었고 건장한 신사는 운전기사였다.)

오가는 길에서 몇 번 스쳤던 은발이 멋지게 어울리는 동네 아저씨쯤으로 알고, 그냥 편하게 퍼질러 앉아서, 나뭇가지(부지깽이)로 굴려주는, 불에 구워진 뜨거운 밤과 콩들을 손으로 주워서 후후 불어 먹고 있는, 옆에 앉은 노인이 현직 대법원장인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리 촌놈이라도 신문 정도는 읽을 줄을 아는 탓에, 뭐가 뭔지는 몰라도 대충 나라의 3부 요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정색을 하고 다시 보니, 가끔 신문에서 보았던 틀림없는 민복기 대법원장이었다.

부연하면, 뒷날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곳은 민복기 대법원장이 가끔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도 하고, 또는 결정하기 어려운 생각들을 정리하고 가는 사랑하는 딸의 집이었는데, 전날 밤 와서 별채에서 쉬고 있던 중이었다고 들었다.

편하게 쉬려 오셔서 이러신다며, 얼른 안으로 드시라는 딸의 성화에, 여기가 법원도 아닌데 왜 여기서 대법원장을 찾느냐고 되러 핀잔을 주면서 “네가 더 쓸데없이 방해를 한다.”며, 마치 맛있는 것을 아이들과 몰래 먹다 들킨 아이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딸을 따라 가던 대법원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5년 전 그 가을날 오후, 산에서 주어온 밤과 밭에서 꺾어온 콩을 구워 먹으며 만났던, 짧은 만남이었고 특별한 대화도 없었지만, 이제 막 촌티를 벗고 있는 스무 살의 아이가, 동네 아저씨로 편하게 만났던 민복기 대법원장과의 대화에서 깨달은 것은, 제아무리 무서운 천하의 권력도, 자리에서 위력이 있고 행하는 것이지, 자리 밖에서는 행하는 것이 아니며, 한낱 잡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역사와 정치적 평가는 논외하고, 1939년 12월 경성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해방 후 1950년 1월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역임하고, 이어 55~56년까지 검찰총장을 지냈고, 법무부장관을 거쳐(63~66년) 68년부터 대법원장직을 맡고 있던, 살아있는 거물인 민복기 대법원장과의 허물없는 만남을 통해서, 당시 갓 스무 살이었던 촌부가 배운 것은, 크든 작던 직함으로 권력을 가진 자의 행실이 어떠해야 하고,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야무지게 배웠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함께 노닥거리며 정분이라도 나눌 동네 과부댁도 없는 심심한 가을날 오후, 마당에 있는 콩을 따다 군것질거리로 삶아 먹다보니, 생각나는 옛 인연 속에서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 보는데, 45년 전의 가을이 45년 후의 가을이 아니라는 사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섬진강은 안개를 삼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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