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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학교의 문제와 해답은, 누가복음 15장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참된 목자 예수의 말씀이 문제고 답이다

[섬진강칼럼] 학교의 문제와 해답은, 누가복음 15장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참된 목자 예수의 말씀이 문제고 답이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3.07.27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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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3세기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온 착한 목자다.
사진 설명 : 3세기 이탈리아에서 발굴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온 착한 목자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학교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992년 한글학회에서 지은 우리말 큰사전을 보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이라 하였고, 네이버 사전에서는 “법규에 따라 계속하여 학생에게 교육을 시행하는 기관”이라 하였으며, 다음 사전에서는 “법규에 따라 교사가 계속하여 학생에게 교육을 시행하는 기관”이라 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30년 전 한글학회에서 짓고 어문각에서 커다란 책으로 발행한 사전과 네이버 사전은 국가와 사회가 공인하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관이라는 같은 의미인데, 다음 사전에서는 여기에 “교사”를 삽입하여, 교사를 학교를 관장 운영하는 주체로 명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교사가 학교의 주체이며 주인일까? 우리의 법률과 사회는 학생과 교사 둘 중 누구를 학교의 주인으로 인정할까? 누가 학교의 주인이냐는 것이다.

만일 교사가 주인이라면 교사의 인권과 (교권) 노동권 즉 교사의 권리가 우선이 되어야 하고, 학생이 주인이라면 학생의 인권과 학습권이 우선이고 중심이 되어야 하기에, 하는 말이다. 학교의 의미와 교사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은, 곧 학교 교육의 기본이고 철학이며 정의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국가와 사회는 이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제다.

만약 이 불명확한 학교의 주인이 국민의 합의로 명쾌하게 규정된다면, 갈등의 원인인 학생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권 즉 노동권이 저절로 정리되는 것은 물론, 가장 중요한 문제지만 방치되고 있는 문제, 즉 우리가 놓치고 있는 아주 정말 중요한 문제, 정상적인 전체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우선 보호해야 하는지, 문제아의 인권과 학습권을 우선 보호해야 하냐는 것까지, 말끔하게 정리되고, 학교가 학교다워질 것이다.

최근 서울 서이초 교사의 자살로 드러난 교권 추락과 문제아의 문제에 관하여, 인권과 교육이라는 미명으로, 당국과 사회가 기계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보면, 정말 어떤 것이 진정한 교사의 교권이고 인권 보호이며, 학생의 인권이고 학습권 보호인지, 특히 무엇이 문제아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책임이 있는 교육 당국은 물론 교사와 학부모와 우리 사회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교권 추락으로 인한 교사들의 고통이 어디 서이초 교사뿐이겠는가. 안타까운 죽음은 가슴 아프지만,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감히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동격이라는 전통적 사상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위엄과 존엄의 자리인 스승의 자리를 스스로 팽개치고 노동자를 자초한 교사들의 업보이므로, 감내할 수 없다면 직업으로 선택하고 있는 교사 지위에서 떠나는 것이, 교사 자신과 학생과 학교에 이로운 일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부연하면, 이유가 무엇이든 학교에서 교사의 자살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본이 되어야 할 스승의 품격을 포기한 것이므로, 스승으로의 자격 미달이다.

세태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할 것 없다. 전국의 교사들 스스로 자신들이 교단에서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인지를 돌아보면 아는 일이다. 지금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상적인 모든 일들은 교사 자신들이 자초한 업보이니 여기서 접어두고….

문제의 핵심은 가정의 부모도 학교의 교사도 통제할 수 없는 문제아들을 어떻게 교육하느냐는 것이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선량한 학생들의 학습권은 최우선으로 보호될 것이고, 스승이든 노동자든 교사들의 교권 역시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정리될 것이다.

문제는 문제아들로부터 무차별 유린당하고 있는 전체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은 물론 교사들의 인권과 교권을 보호하면서, 문제아 자신들을 바르게 교육하는 방법이 뭐냐는 것인데, 이 해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원인과 해결책을 두고, 사람들마다 관련 단체들마다 그야말로 백가쟁명이라, 요원한 일이지만 오랜 세월 교육개혁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내 나름으로 결론을 낸다면,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누가복음 15장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는 참된 목자 예수의 말씀이 시작이었고, 해결하는 해답 또한 예수의 말씀뿐이다.

다음의 내용은 저 유명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것으로, 예수가 사람들의 질문에 비유로 든 참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은 이야기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위 교회 안팎에서 많은 사람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를 비유한 예수의 말씀에 대한 나의 분석은 단순하다.

한 명의 죄인도 포기하지 않고 회개시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예수의 인간 사랑과 구원의 방법론으로, 인간 정신을 일깨우며 구현하는 가르침이며, 이것이 서양 사회가 끊임없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세상으로 발전하여 나가는 지침이 되었고, 오늘날 문명한 인류가 사람을 사랑하고 교육하는 교육관 교육사상이 되었다.

여기서 사람들이 잘못 곡해하며 놓치고 있는 문제는, 학교와 사회의 골칫거리이며, 죄와 악의 씨가 되는 문제아들을 회개시켜 구원하는 방법이다.

말인즉슨, 예수가 비유를 든 이야기, 참된 목자가 기르는 백 마리의 양들 가운데, 한 마리가 없음을 알아차리고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에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이 들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기르는 양들을 “들”이라는 (사방이 탁 트인) 안전한 장소로 이동시킨 후 한 마리가 없음을 확인한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안전한 장소에 보호조치를 한 후였다는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문제아들을 바르게 이끌어 스스로 자신을 구원시키면서, 전체 선량한 학생들과 교사들을 문제아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 학교를 안정시켜 교육의 도량으로 만드는 해결책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구절에 있다.

설명하면, 예수가 목자의 이야기로 비유를 든, 들 가운데 아흔아홉 마리 양들은, 곧 하늘에 있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한 사람의 악인으로부터 의인 아흔아홉 사람이 하늘에서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해답이다.

예수가 먼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안전한 들에서 즉 아흔아홉의 의인들을 안전한 하늘에서 보호한 후 한 사람의 악인을 회개시켜 합류시켰듯이….

지금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적응하지도 못하고 순응하지도 않는 문제아들로부터, 선량한 전체 학생들과 교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일이다.

그런 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 즉 한 사람 악인을 회개시키는 것, 즉 문제아를 회개시켜 구원하는 교육인데, 바로 이것을 놓치고 있고 이것이 오늘 젊은 교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늘 그렇듯 문제아들을 해결한답시고, 다른 반으로 또는 다른 학교로 보내고 있는데, 그럼 그 문제아로부터 일방적인 피해를 봐야 하는 다른 반 학생들과 다른 학교의 학생들은 무슨 죄이고, 사람에 따라서 그 피해는 평생을 갈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 피해로부터 어떻게 보호받고 피해는 누가 보상해야 하는가? 

참고로 성추행 등등 부적절한 범죄를 저지른 교사를 다른 반으로 다른 학교로 발령하고 있는데, 이 또한 마찬가지로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결론을 지으면, 지금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즉 젊은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목자의 이야기를, 우리 사회가 잘못 해석한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장 먼저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전체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보다, 한 명의 악인 문제아의 인권과 학습권을 중시하고 있는 잘못된 교육관이 만든 비극이다.

예수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먼저 보호하였듯이, 필요하다면 관련법을 새롭게 하여서라도, 문제아들로부터 선량한 전체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은 물론 교사들의 인권과 교권을 최우선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옥황상제(玉皇上帝)의 복숭아를 몰래 따먹는 등등 천계(天界)에서 온갖 난동을 피우는 (원숭이) 손오공을 지상으로 내쫓아 500년 동안 바위 속에 가두었다가, 삼장법사가 관세음보살로부터 얻은 요괴를 통제하는 긴고아(紧箍兒)를 (요즘 말로 전자 머리테) 손오공의 머리에 씌워 길들이며 회개시켰듯이, 문제아들을 통제하고 교육하는 별도의 강력한 법과 규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모든 학생의 인권과 학습권은 똑같다. 어떠한 차별도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문제는 학교에서 한 명의 문제아와 전체 선량한 학생들의 인권과 학습권을 두고 가장 먼저 보호해야 할 대상을 가려야 할 경우, 전체인 선량한 학생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예수가 말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는 목자의 이야기를 잘못 해석하여 한 명의 문제아를 위해서, 전체인 선량한 학생들과 교사들을 즉 학교를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다.

예수가 말한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안전한 들에 보호조치를 한 후였듯이, 서유기에서 삼장법사가 난동을 피우는 손오공을 특별한 조치로 통제하여 길들여 회개시켰듯이, 이렇게 하는 것이 학교에서 선량한 전체 학생들과 교사들을 보호하고, 문제아 자신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다.

문(門)이 없는 문 허허당(虛虛堂)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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