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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의 영성...16인의 종교사회학자,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다

식탁의 영성...16인의 종교사회학자,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다

  • 기자명 황인혜 기자
  • 입력 2013.04.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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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6명의 종교사회학 전공자들이 먹는 행위의 의미, 인간적인 식사, 생태적인 밥상으로의 대안을 이야기한다. 각 종교에서 보는 먹거리의 의미와 그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 그리고 종교적 음식 금기의 내용과 의미, 현대인에게 유용한 지혜를 밝혀 주고, 채식 혹은 건전한 육식, 소식, 현대의 정치경제 및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먹거리의 문제와 대안을 제시한다.

■ 출판사 서평

비만과 굶주림의 공존 - 지옥의 풍경

‘일상화된 비만’이 일국의 문제를 넘어 전 세계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러는 한편에서는 여전히 절대빈곤을 넘어 ‘아사(餓死)’하는 인구 또한 줄어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괴기스런 풍경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비야말로 지옥의 풍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이렇게 밥 한 그릇을 쉽게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금과옥조요, “쌀밥에 고깃국”이 최고의 행복을 표현하는 기준이 되던 시절은 단지 못 먹고 굶주리던 과거 역사의 유언(流言, 遺言)일 뿐인가? 어느덧 ‘쌀밥’이 남아돌아가고, ‘건강’을 위해선 오히려 ‘순 쌀밥’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신 금과옥조가 된 지 오래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간취해야 할 의미는 무엇인가?

단테의 신곡에 나온다는 이야기로, 천국과 지옥의 풍경이 모두 판박이로 같은데, 천국은 식탁 위의 진수성찬을 긴 숟가락을 이용하여 다른 이에게 먹여주고, 지옥은 반대로 자기만 먹으려다 결국 먹지 못하고 굶주린다는 우화가 지금-여기 우리가 사는 세계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행위, 먹는다는 것이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극단적인 대비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극히 일상적이고 너무나 당연시해서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그저 먹거리를 소유하고 소비할 뿐, 먹는다는 행위가 무엇인지, 그 먹거리가 어떻게 생산 분배되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 것인지, 내 식탁 위의 음식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자각이 필요한 때이다.

일상화된 비만과 죽음에 이르는 굶주림은 단지 ‘먹거리’만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의 틈새를 헤집어 넓히며 몸집을 불려온 자본주의가 이제 인간의 본성에 가장 충실한 체제로까지 여겨지면서, 누구나 ‘조금만 더’를 외치고, 화려한 욕망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치장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영혼은 더욱 더 허기를 느끼고, 그 바람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먹을 것에 매달리고, 또다시 물질적 풍요에 매달리는 것이다.

내 밥상에 우주(세상)가 담겨 있다 - 생명의 원리

오늘날 지구촌 인류-는 물론 지구 생명계 전체-에게 최대의 위협이 되고 있는 기후 위기 역시 그러한 소비의 불균형과 욕망이라는 맥락의 끝자락에 놓인 것임을 이해해야만 출구가 보인다.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밥은 무엇인가? 밥이 우리에게 주어지기까지 온 우주가 애를 쓰서 매달려야 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에너지가 들어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먹는 소중한 음식에 온 우주(세상) 생명이 담겨 있다는 신령한 것임을 이해하는 순간, 나 한사람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의 장이 펼쳐질 것임을, 이 책은 암시하고 있다.

■ 본문 중에서 - 음식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 할 만큼 불행한 상황은 더 없을 겁니다. 물론 지구상 곳곳에서 그 불행한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조차 없어서 삶이 위협받는 빈곤한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음식이 그 자체로 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필사적으로 음식을 구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지요. 그래도 잘 구하지 못할 만큼 힘든 조건에 놓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어느 정도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굶주리는 사람들이 음식을 지상과제로 삼지 않고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20쪽)

어느 날 스승은 의술의 마지막 비법을 알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희망에 부푼 지와까에게 스승은 묘한 지시를 하였습니다. 전국을 다 뒤져서‘약에 쓸 수 없는 풀들만 골라서 한 바구니를 구해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지와까는 명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하지만 산과 들에 널려 있는 풀들 중에 서 약에 쓸 수 없는 풀을 찾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이윽고집으로 돌아온 지와까에게 스승이‘얼마나 캐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지와까는‘아무리 뒤져보아도 쓸모없는 풀을 찾을 수 없어서 스승님의 분부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그때 스승님은 뜻밖에도 자비스럽게 말했습니다.“ 하나도 구해 오지 못했다는 말이지? 잘했다! 쓸모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는너는 참으로 어진 의사가 될 것이다. 이제 아픈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러 가라.” (53쪽)

현재 지구상에는 두 가지 형태의 기이한 단식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극빈자들의 불가피한 단식과 반대로 날씬한 몸을 위한 거식증(拒食症)적 단식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양극단적 단식 현상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놀라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단식의 양태는 결국 탐욕이라는 하나의 근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국적 팽창을 꿈꾸는 자본주의적 탐욕과 무한 독재정권을 실현하려는 정치적 지배욕이 극단적인 부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한쪽에서는 배고파 굶어 죽고 한쪽에서는 오히려 먹은 것을 토해내는 웃지못할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더욱 씁쓸한 것은 우리 자신도 역시 이러한 탐욕적 메커니즘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85쪽)

무슬림들은 동물을 때리거나 머리를 베어 죽여도, 기계톱을 써서 죽여도 안 됩니다. 무슬림들은 도살하기 전에 동물을 놀라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두고 이견이 있습니다. 놀라서 죽게 하지 않는 한 괜찮다고 하는 무슬림들이 있는 반면, 놀라게 하는 것 자체가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기에 잘못된 것이라고 보는 무슬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고통 없이 도축하는 것이 이슬람식 도축법인 것은 분명합니다. 또 소가죽을 얻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소가 완전히 죽은 상태에서 벗겨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살아 있는 상태에서 피부에 손을 댄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잔인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축에 쓸 칼도 동물 앞에 서 날카롭게 갈아서는 안 됩니다. 이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115쪽)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식품 생산에 대한 미국 연방보조금은 곡물이 전체 금액의 13.23%, 육류·유제품은 73.80%로 곡물과 고기 생산에 무려 87%의 보조금이 투입됐습니다. 여기에 수산자원의 고갈 문제가 구조적으로 연결됩니다. 전 세계에서 남획되는 물고기의 절반 이상이 가축사료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곡물의 상당 부분이 가축뿐만 아니라 바이오 연료 생산에도 투입되기 때문에 사실상 식량 경제가 에너지 경제와도 결합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중략) 인류가 사용하는 농경지의 80%를 육류 생산에 투입하고, 물의 70% 정도를 육류 생산에 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밥상의 선택은 이러한 산업구조를 바꾸며 상식과 심오한 가치가 반영되는 경제생활의 재창조를 알리는 알림장과 같습니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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