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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소설] 송강(松江)정철의 러브 스토리...정철과 강아의 사랑

[5분 소설] 송강(松江)정철의 러브 스토리...정철과 강아의 사랑

  • 기자명 서울시정일보
  • 입력 2023.12.13 11:38
  • 수정 2023.12.18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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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일보] 송강(松江)정철의 러브 스토리 정철과 강아의 사랑이야기다.

중국 두보에 버금가는 조선조 당대 시인이며 대문학가인 송강 정철은 관기 강아와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나눴다. 

강아는 원래 이름이 진옥이고 기명(妓名)은 자미(紫微)였지만 정철의 호인 송강(松江)의 ‘강(江)’ 자(字)를 따 강아(江娥)라고 불렸다. 

강아는 시조문학에 있어 '송강첩(松江妾)'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시조 문헌 중에 '누구의 첩'이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강아 뿐이다. 

대개는 기녀가 속한 지명을 따라 남원명기 평안기생 등 기명을 적었으나 강아는 기녀였음에도 불구하고 '송강첩' 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은 물론 송강의 명성과 지위 때문에 얻어진 것이리라 생각되는데 이를 보아도 송강 정철과 강아의 사연이 당시 사람들 기억 속에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었음이 분명한 것 같다.

강아와 송강의 만남은 송강 정철이 전라도 관찰사로서 인연을 맺게 된다. 

정철은 당시 불과 십여 세 남짓의 어린 소녀 강아에게 머리를 얹어 주고 하룻밤을 같이 할 수도 있었으나 청렴결백했던 정철은 어린 강아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고 다만 명예로운 첫 서방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정철의 인간다움에 반한 강아는 어린 마음에도 그가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정철 또한 어리지만 영리한 강아를 마음으로 사랑하며 한가할 때면 옆에 앉혀 놓고 틈틈이 자신이 지은 사미인곡을 외어 주고 가사(歌辭:조선 초 시조와 산문의 중간형태)를 가르쳐주고 서로가 정신적인 교감을 나누었다. 

즉 정철과 강아는 육체적인 애로스 사랑보다 정신적인 플라토닉 사랑을 한 셈이다. 

그러나 정철이 도승지(都承旨)로 승진하여 한양으로 발령이 나서 떠나게 되었다. 

열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그 동안 정철을 깊이 사랑하게 된 강아는 떠나는 정철을 붙잡을 수도 쫓아갈 수도 없는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낙담한 채로 체념의 눈물을 흘릴 뿐이었고 그런 강아의 마음을 잘 아는 정철은 작별의 시를 지어 주면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봄빛 가득한 동산에 백일홍 곱게 피어 그 예쁜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서서 장안을 바라보지 말아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너의 고움을 사랑하네.​'

이 시 속에는 강아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남겨져 상처 입은 여인에게 당부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좋은 낭군을 만나 시집가서 잘 살고 자기는 생각하지 말라는 배려가 녹아있다. 

어린 나이에 머리를 얹은 이후에 단 한 순간도 정철을 잊지 못했던 강아는 관기노릇을 하며 다시 정철을 만나겠다는 열망으로 십년 고절(孤節) (홀로 지키는 절개)의 세월을 버텨냈다. 

기생의 처지로서 다른 남자들의 유혹을 거부하며 수절한다는 것은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어느 날 정철이 북녘땅 끝 강계로 귀양을 갔다는 소식을 들은 강아는 이제서야 그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혼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정철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서둘러 행랑을 꾸려 길을 나섰다. 

가녀린 몸으로 삼천리(三千里) 길을 걸어서 강계로 달려온 강아는 위리안치되어 하늘 한자락 보이지 않게 가시나무로 둘러싸인 초라한 초막에서 홀로앉아 책을 읽는 정철의 초췌한 모습에 진주 같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자기 앞에 엎드려 울고 있는 어여쁜 여인을 본 정철은 당황해 하면서 그녀에게 누구인지 물어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의 강아는 십 여세의 어린 소녀였으므로 성장한 강아의 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

그날 이후 정철의 유배생활은 조금도 괴롭거나 우울하지 않았으며 정철의 마음이 울적할 때면 강아는 항상 정철의 곁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기쁨을 주었다.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 반려자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고 예술적 호흡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울음을 그친 강아가 정철에게 조용히 입을 열고 말하였다. ​“저를 어찌 몰라보시는지요? 

10여년 전에 나으리께서 머리를 얹어 주셨던 진옥이옵니다.” 

강아는 정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것과 귀양소식을 듣고 그를 보살피고자 달려왔음을 고하였다.

희미한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서 강아를 마주한 정철은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한 그녀에게서 여인의 향기를 느꼈다. 

술이 거나해진 정철이 무거운 정적을 깨고 강아에게 말했다.

"진옥아! 내가 먼저 한수 읊을 터이니 너는 화답(和答)하거라. 

지체해서는 안 되느니라."

"옥이 옥이라하여 번옥(燔玉):(돌가루를 구워 만든 옥)으로만 여기었더니 이제 보아하니 진옥(眞玉)(진짜 옥)임이 분명하다. 

나에게 살 송곳이 있으니 한번 뚫어볼까 하노라." 

탁월한 시인이던 정철은 강아에게 노골적인 음사(淫事)를 시의 형태를 빌어서 읊었다. 

‘번옥(燔玉)’은 어리게만 여겼던 강아를 은유한 것이고 ‘진옥(眞玉)’은 이제는 어엿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는 성숙한 강아를 은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남녀 간의 육체적 합일(合一)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 배어있는 시이다. 

강아는 지체없이 화답하였다. ​

"철이 철이라 하여 석철(石鐵)이라 여겼더니 이제 보아하니 정철(正鐵) (진짜 철)이 분명하고 마침 나에게는 골풀무가 있으니 녹여볼까 하노라."​

이 대담한 강아의 시는 당대의 대 문장가인 정철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강아는 정철을 쇠로 비유하며 자신을 여자로 받아주지 않았던 정철을 석철(石鐵)에 비유하였고 이제 믿음직한 남성으로 자신을 여인으로 받아들 이고자 하는 정철을 정철(正鐵)이라은유하였다. 

그리고 철을 녹일 수 있는 골풀무가 자신에게 있으니 이제 녹여 줄 수 있다며 응수한 것이다. 

골풀무란 불을 피울 때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인데 강아는 이것을 남자를 녹여내는 여자의 성기로 은유했으니 이만하면 강아도 명기(名妓)요 훌륭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

강아는 단순한 생활의 반려자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기녀가 아니었다. 

정철에게 강아는 그 이상의 존재였고 예술적 호흡을 가능하게 만드는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항상 정철의 곁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기쁨을 주었다. 

정철은 강아와 시를 나누고 그녀의 문학에 대한 조예와 아름다움에 반했다.

이들이 적소에서 나눈 사랑에는 단순한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만이 아닌 예술인의 깊고 깊은 교분이 존재했다. 

정철은 유배지에서 부인에게 서신을 보낼 때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적어 보냈다.

부인의 서신 속에서도 남편에 대한 투기나 불평보다는 남편의 적소 생활을 위로해 주는 강아에 대한 고마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불우한 자기 남편의 생활 속에서 위로해주는 여자라면 조금도 나무랄 것이 없다는 부인의 글을 받고 정철은 고마워했다. 

강아도 역시나 정철 부인의 너그러운 마음을 고마워하며 정철을 더욱 알뜰하게 보살폈다. 

정철과 강아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정철을 한양으로 불렀다. 

정철은 유배지 생활을 청산하는 기쁨과 함께 그동안 같이 한 강아와의 아쉬운 이별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정철을 떠나보내면서 강아는 그녀의 아쉬운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오늘밤도 이별을 하는 사람이 하 많겠지요. 슬프다!  밝은 달빛만 물 위에 지네. 애닯다! 이밤을 그대는 어디에서 자오.나그네 창가에는 외로운 기러기 울음뿐이네.​"

정철 부인 안씨는 남편에게 강아와 한양으로 함께 오기를 권했지만 강아는 거절 했으며 혼자서 강계에 살며 외로운 세월을 보냈다. 

선조의 특명으로 전라도 충청도의 도제찰사로 임명된 정철을 찾아 강아는 다시 홀홀단신 적진을 뚫고 남하 하다 적병에게 붙잡혔다.

자신의 몸을 조국에 바치기로 결심한 강아는 적장(敵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유혹해 아군에게 첩보를 제공하여 결국에는 전세를 역전시켜 평양 탈환의 숨은 공을 세웠다. 

그 이후 강아는 이제는 정철을 다시 모실 수 없는 몸이 되었음을 슬퍼하며 ‘소심보살’ 이란 이름으로 입산수도(入山修道)했다.

선조 26년 12월 18일 정철이 강화도에서 생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들은 강아는 이 세상에 정철이 없다는 가혹한 슬픔으로 몸부림치다가 정철의 묘소(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를 찾아 시묘(侍墓) 생활을 했다.

남은 생애를 송강의 모함을 풀고 신원을 복위시키려 온 힘을 쏟았던 강아는 결국 그 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나중에 정철의 묘는 충북 진천으로 이장되었으나 강아의 묘는 정철의 처음 묘가 있던 송강마을에 남아있다.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에 위치한 송강마을에는 송강 정철을 기리는 송강문학관과 더불어 강아의 무덤이 있어 정철과 강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무덤 앞에 있는 묘비 전면에는 의기강아묘(義妓江娥墓)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정철과 강아의 사랑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

그의 묘는 정철 후손들이 오백년을 이어 오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아와 정철의 세월을 초월한 사랑은 후세들에게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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