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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김석진(金奭鎭)선생

2월의 독립운동가 김석진(金奭鎭)선생

  • 기자명 김삼종 기자
  • 입력 2012.01.31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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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 1. 21 ~ 1910. 9. 8.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 당시 일제작위 수여를 거절하고 병탄에 항거하여 음독 자결한 김석진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의 호는 오천(梧泉)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사헌부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일제의 침략에 통분하여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으로 낙향하여「사안당(思安堂)」을 짓고 와신상담하며 은거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와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용인 받고,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한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의 지사들이 자결․순국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홍만식은 김석진과 함께 시류를 논하였었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국정을 함께하였던 관료였다.
선생도 즉각 서울로 올라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5적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상소하는 등 강경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강화하고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병탄하였다. 나아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선생 등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지도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금(金)을 주어 회유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이러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작위수여 등 일체를 거절하고 1910년 9월 8일 서울 오현(현,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북서울 꿈의 숲 공원 내)에 있는 조부모 묘소의 재실인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에서 음독 자결하였다.

한말의병장 유인석은 당시 일제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의병봉기’와 ‘은둔 또는 망명’, ‘자정수지(自靖遂志:자결)’ 세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선생은 ‘은둔과 자결’을 택한 것이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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