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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해(大韓海) '바다와 해양의 경계' 4판에 Sea Of Korea 표기해야

대한해(大韓海) '바다와 해양의 경계' 4판에 Sea Of Korea 표기해야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2.01.1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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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전 고궁박물관 연구원 / 본지 논설위원
1897년 9월 26일 외부 협판(外部 協辦) 유기환(兪箕煥), 충청도 유학(幼學) 심노문(沈魯文) 등이 황제(皇帝)로 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9월 28일 시독(侍讀) 김두병(金斗秉)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9월 29일 김규홍(金奎弘)이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택정할 것에 대해 간심(看審)하겠다고 아뢰었다.김재현(金在顯) 등 716명이 황제로 칭할 것을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9월 30일 시임 의정(時任議政)과 원임 의정(原任議政) 이하가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고 진사(進士) 이수병(李秀丙) 등이 황제로 칭할 것을 주청하였다.10월 1일 황단(皇壇)을 설치할 장소를 간심(看審)하였다. 심순택(沈舜澤) 등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여 황제로 칭할 것을 아뢰었다.10월 2일 승지(承旨) 김선주(金善柱) 등이 상소를 올려 황제로 높여 부를 것을 청하였다.10월 3일 심순택 등이 정청하여 다시 황제라고 부를 것을 아뢰었다. 시임 의정과 원임 의정 이하가 황제 국가의 제도에 대해 아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황후를 책봉하며 태자를 책봉하는 날짜를 정하였다. 10월 7일 즉조당의 편액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고쳤다.궁내부 관제 가운데 황단 사제서 증치 건을 반포하였다.10월 8일 사직단의 위판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쓰도록 하였다.대한국(大韓國) 고조(高祖)는 10월 12일에 백악(白嶽:북악산)의 남쪽 황단(皇壇)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를 올리고 대한국(大韓國) 1대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에 등극하며 천하에 국호(國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이 해로써 광무(光武) 원년(元年)을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었다. 1897년 대한국(大韓國) 황궁(皇宮)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한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황제위에 등극하기 전 대신들을 불러모아 새로운 국호(國號)를 의논하고 제후국에서 황제국(皇帝國)으로 국격이 격상되어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며 모든 예가 다 새로워졌으니 황단(皇壇)에 첫 천제(天祭)를 봉행하는 지금부터 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하며 우리나라는 곧 3한(三韓:고구려,백제,신라)의 영토에서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고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므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皇帝)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으므로 조선(朝鮮)은 황제국(皇帝國) 국호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大韓)은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쓴 적이 없고 한(韓)이란 이름은 고유한 우리나라의 이름이며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니 대한(大韓)을 국호로 한다. 국호(國號)를 3한(三韓)을 아우른 큰 한(韓)이라는 의미의 ‘대한(大韓)’으로 정해져 황단(皇壇)에서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대한(大韓)’으로 썼다. 단군(檀君) 이래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신라의 3한(三韓) 영토를 통일(統一)하였다. 태조(太祖) 고황제가 용흥(龍興)하여 밖으로 개척한 영토가 더욱 넓어져 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의 계(界)를 다하여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탐라(耽羅: 제주도)을 거두어 탐라에서 귤과 풍부한 해산물을 공(貢)하였고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말갈(靺鞨: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이르는 영토를 통일(統一)하는 업(業)을 세우셨다. 산하가 공고하여 복(福)을 우리 자손만세(子孫萬歲) 반석의 종(宗)에 드리셨고 상제(上帝)께서 위태함을 돌려 평안(平安)함을 갖게 하고 독립(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自主)의 권리(權利)를 행하게 하셨다. 10월 12일 황제(黃帝)의 자리에 등극하고 왕후 민씨를 명성황후(明成皇后)로 추책(追冊)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冊封)하고 산호만세(山呼萬歲) 등을 창하였다.10월 13일 황태자가 황제에게 축하 인사를 올리는 진치사의(進致詞儀),문무백관들이 황제에게 축하를 올리는 하표의(賀表儀)를 거행하였고 칙서(勅書)를 반포하여 대사령(大赦令)을 반포하였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하고 임금을 황제로 칭한다고 선포하였다.대시령(待時令)을 내려 중죄인들의 죄를 가볍게 해주었다.10월 14일 태극전에 나아가 명헌태후(明憲太后)에게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왕태자비 민씨를 황태자비로 책봉하였다.10월 16일 태묘(太廟)에 삭제(朔祭)를 지낼 때 헌종실과 철종실에 대한 칭호를 정하였다.12월 2일 고조 광무제가 대한국 황제(皇帝)에 즉위한 날을 계천기원절(繼天紀元節)로 칭하였다.

일본이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울릉도(鬱陵島)와 독도(獨島:Dokdo) 사이에 국제법적으로 불법적인 국경선을 임의로 획정하고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불법적으로 표기한 왜곡 교과서의 검정 승인에 이어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외교청서,방위백서를 발간하였다. 일본의 역사적, 국제법적으로 명백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외교청서,방위백서 발간,교과서의 검정 승인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에 대한 침략 도발이므로 즉각적인 영토주권 침해의 시정을 촉구하고 국제수로기구(IHO)에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의 Sea Of Korea 표기 환원을 요구해야 한다. 1909년 11월 대한국(大韓國:Korea)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를 표기한 고지도를 상설전시, 교육홍보하고 역사적,국제법적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와 독도(獨島:Dokdo)의 영유권을 확립하여 대한국(大韓國:Korea) 114년 역사를 바로세우고 일본 정부의 대한국령(大韓國領)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 독도(獨島:Dokdo)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대한국(大韓國)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황단(皇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1대 광무제에 등극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천명하여 대한시대(大韓時代)가 시작되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국호 및 영토,영해가 1919년 9월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계승되었다. 한반도 제주도 간도(間島) 대한해(Sea Of Korea) 독도(Dokdo) 울릉도(鬱陵島) 대마도(對馬島)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대한국(大韓國)의 고조 광무제(高祖 光武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으며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鬱陵島)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했다.고조 광무제는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제는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도발하고 대한제국 한성을 공격하여 황궁 경운궁을 점령한 후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제국 영토를 일본의 군사기지로 제공하는 갑진늑약을 불법 늑결하였다.

일제(日帝)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무력을 동원하여 1905년 2월 대한해(大韓海:Sea Of Korea)의 독도(獨島)를 비롯한 대한국(大韓國)의 군사 요충지를 불법 점령하였으나 1906년 울릉군수 심흥택은 독도를 울릉군 소속이라고 밝혀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이며 울릉군에 소속된 행정관할구역임을 확인하였으며 1907년 현성운(玄聖運)이 제작한 대한전도(大韓全圖)와 현공렴(玄公廉)이 1908년에 제작한 대한제국지도(大韓帝國地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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