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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년 전 자연보호 정책 ... 송금비’ 서울시 문화재 지정

6백년 전 자연보호 정책 ... 송금비’ 서울시 문화재 지정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2.01.11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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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자연보호 정책 한 눈에

1970년대 초등학교 교정 어딘가에는 예외 없이 ‘자연보호헌장기념비’라는 것이 있었고 그 당시 학교를 다녔던 어른들은 누구나 자연보호헌장을 한번쯤 암기했던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연보호헌장이 제정된 지 올해로 34주년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자연보호정책’과 같은 역할을 했던 600년 전 조선시대 ‘송금정책’의 실례를 보여주는 송금비가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된다.

‘송금(松禁)비’는 국가에서 송금 지역으로 정한 토지에 소나무를 무단으로 벌목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최근 북한산에서 <경천군 이해룡 송금물침비> 2기가 현존하는 것을 발견해 이를 시문화재위원회에 안건으로 상정․심의(2011.12.8)를 거쳤고, 올해 3월 중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할 계획이라고 11일(수) 밝혔다.

<경천군 이해룡 송금물침비>는 조선시대 임란 전후 일본과의 화평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며, 경천군으로 봉해진 경주이씨 이해룡(李海龍)에게 1614년 광해군이 하사한 토지의 경계 지역 내의 소나무를 무단으로 침범 혹은 벌목하는 것을 금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송금비 2기는 1614년 광해군 때 세운 것으로서 그동안 문헌상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던 조선시대 임업정책의 실례를 방증하는 유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고 판단돼 이같이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게 됐다고 시는 밝혔다.
아울러 송금비 2기 중 1기는 원위치가 아니고 일부는 훼손되기도 했지만, 2기 모두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선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해온 우리 선조들의 자연환경 보존정책을 잘 살펴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향후 시는 <경천군 이해룡 송금물침비>에 대한 문화재 지정계획을 2012년 1월 12일부터 30일 동안 예고해 각계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최종심의를 거쳐 올해 3월 중 서울시 기념물로 최종 지정고시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송금비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지금보다 철저하게 관리․보존돼 전 시민들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자 역사학습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시는 기대했다.

<경천군 이해룡 송금물침비>는 북한산 내 총 2기가 현존하는데, 첫 번째 송금비는 북한산 둘레길 내시묘역길 구간에 위치(진관동 산 25번지 일대)하고, 두 번째 송금비는 북한산 초등학교 인근(진관동 273-2) 에 위치한다.
첫 번째 송금비가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반면, 두 번째 송금비는 그 동안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다가 2011년 4월 15일 원 송금비로부터 200m 북쪽에서 우연히 발견됐다.
○ 첫 번째 송금비는 전면에 慶川君 賜牌定界內 松禁勿侵碑(경천군 사패정계내 송금물침비) 즉 “경천군에게 하사한 경계 내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니 들어가지 말라”라는 명문이 있으며, 후면에는 萬曆四十二年 甲寅十月(만력 42년 갑인 10월)라는 기록으로 보아 1614년에 새워진 비임을 알 수 있다.
○ 두 번째 송금비는 전면에는 “慶川君 賜牌定界內 禁松勿侵碑(경천군 사패정계내 금송물침비)” 즉, 경천군에게 하사한 토지 경계내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금하니 들어가지 말라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鄭氏 □□朴公 兩位之墓” 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후면의 ‘양위지묘’ 각자로 보아 묘역에 세우는 묘표를 송금비로 재활용했거나, 송금비를 묘표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두 송금비의 규격과 형태, 내용은 비슷하지만 다소 다른 점도 있다.

비의 <전면>을 보면 진관동 산 25번지 원 송금비에는 전면에 '松禁'이라고 표기되고, 두 번째 송금비에는 '禁松'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상에는 '송금'과 '금송'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이 두 비가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다면 왜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했는지 의문이 생긴다.
또한 원 송금비에는 후면에 입비 시기(만력 42년 갑인)가 새겨져 있으나 두 번째 송금비에는 입비 시기가 없이 “□□鄭氏 □□朴公 兩位之墓” 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이로 보아 두 번째 송금비는 묘비를 송금비로 재활용했거나 또는 송금비를 묘비로 재활용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두 송금비 중 어떤 비가 먼저 새겨졌는지, 또는 두 번째 송금비의 원위치와 이 비가 묘표로 활용된 경위 등은 현재로서는 규명하기 어렵다.

소나무는 선박 등을 만드는 조선재(造船材), 건물을 짓는 건축재, 불을 밝히는 연료재로 쓰이고, 소나무 껍질과 송진 등의 부산물은 흉년이 극심할 때 식량 대용으로 사용되는 등, 전통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으며 '송금(松禁)' 이란 역사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소나무의 생장에 적당한 곳을 선정하여 보호하고 벌목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송금 정책은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시행됐다.
고려 때 이미 국가에서 소나무를 심고 함부로 베어 내지 못하게 했는데 ≪고려사≫에 현종 4년(1013)에 “성내(城內)의 송백남벌을 금함과 아울러 공용(公用)에 쓸 것 이외에는 시기에 어긋나서 벌송(伐松)함을 일체 금지하였다.”는 기록으로 잘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소나무에 대한 관리와 보호가 더욱 체계적으로 되었으며 '국가의 큰 정책'이었음을 아래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태조는 즉위하던 해에 “고려조 종묘의 소나무를 베지 말 것을 명했다”는 기록(上曰且勿伐前朝宗廟松木)으로 보아, 종묘의 소나무 벌채를 금하였음을 알 수 있고, 1398년(태조 7)에는 "경복궁 왼쪽 언덕의 소나무가 말라 죽자 부근의 민가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송충이가 종묘의 솔잎을 먹자 사람을 동원해서 송충이를 잡게 하기도 하는 등" 소나무를 보존하고자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세조 7년(1461)에는 송금과 관련된 상벌 규정이 제정되었는데, 여기서는 벌목한 소나무의 그루 수에 따라 벌목한 자와 산지기에 대한 처벌 내용을 규정하고 있다.
즉 소나무 1~2그루를 벤 자에 대해 곤장 100대를 때리고, 3~4그루를 베었을때는 곤장 100대와 군인으로 내보내고, 10그루 이상 베었을 때는 곤장 100대와 변경으로 추방하는 등 그 내용을 보면 엄벌주의로 임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상당수의 권세가들이 농토를 만들기 위해 산림을 개간하거나 묘지로 쓰기 위해 훼손하는 일이 늘어남에 따라, 이를 막기 위해 1788년 정조때 <송금사목>을 재정해 소나무 숲의 관리를 강화하였다. 또한 이 <송금사목>을 한글로 번역하여 관할 주민에게 고루 주지시키도록 규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잘 관리되던 산림은 일제 강점기에 많이 훼손되기는 하였지만, 송금 정책은 조선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일관되게 시행해왔던 오늘날의 자연환경 보존정책이라 할 수 있다.

송금물침비의 주인공 경천군 이해룡은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지만 <조선왕조실록> 및 <해행총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임란 전후해 조선통신사 수행 역관(譯官) 및 사자관(寫字官)으로 활동한 인물로 추정되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해수(海叟), 호는 북악(北嶽)으로, 벼슬은 역관·사자관을 거쳐 내섬시주부(內贍寺主簿)에 이르렀다.
경천군 이해룡은 1588년(선조 21)에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따라 통신사를 수행하였고, 임란 중에는 중국에 대한 원군요청, 일본과의 강화 회담 등 전후 막후교섭 시 통사(역관)로서 주변국의 정세 파악, 사신접대 등 외교 일선에서 활약했다.
또한 사자관으로서 일본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한석봉에 버금가는 글씨라는 명성을 얻었는데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후에 군(君)에 봉해졌다.

이해룡이 조선통신사 사자관으로 도일하여(1590년) 일본 곳곳에 필적을 남기고 당대의 명필로 명성을 날렸다는 사실은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로서 도일한 김성일이 남긴 <해사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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