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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독립운동가 김종진(金宗鎭)선생

12월의 독립운동가 김종진(金宗鎭)선생

  • 기자명 김삼종 부사장
  • 입력 2011.11.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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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만주 아나키스트(1901. 12. 26 ~ 1931. 7. 11)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좌진이 이끄는 신민부, 한족총연합회에 가담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중국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고 독립 운동기지 건설을 주도한 김종진 선생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에서 부친 영규와 청송심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백야 김좌진 장군의 6촌 동생이기도 한 선생은 1919년 3월 홍성군 만세시위의 선봉에 섰다가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상경하였다.

서울 중동학교 중학속성과에 입학 후 비밀출판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나가던 선생은 친척 형인 연진씨가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잠입하여 국내와의 연락책임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망명을 결심하고, 1920년 4월 북경에서 이회영 선생 등을 만난 후 군사적 학식과 훈련을 쌓은 유능한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1921년 1월 이회영 선생의 소개로 운남군관학교 교도대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치고, 이어 운남강무당 16기생으로 정식 사관교육을 받은 선생은 1925년 4월, 졸업 후 동기생 김노원과 함께 남경, 한구, 무창 등을 여행하며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고, 북경에서 이회영 선생을 만나 수일에 걸친 사상담화를 나누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과 행동양식을 정립하게 되었다.

1927년 10월 선생은 만주에 도착하여 김좌진의 신민부에 합류하였고, 둔전(屯田)양성을 통한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을 계획하였다. 1928년 1월 초부터 약 8개월 동안 신민부 영향권 하의 북간도 일대 교민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고 위무하였으며, 동지들을 결집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듬해 7월 선생은 이을규 등과 함께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만주지역 아나키스트들을 조직화하는 한편, 이를 통하여 신민부를 재편하여 각 지역 농무협회를 연합한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선생은 농무 및 조직선전을 담당하였으며 한족총연합회가 표방한 재만동표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는 동포들에게 크게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의 순국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후 아나키스트 신현상의 호서은행 탈취, 이회영, 백정기 선생의 천진 시내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 습격 등을 통한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통해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31년 7월 11일 선생께서 순국하신후 선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만주지역에서의 민족해방운동기지 건설운동은 사실상 와해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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