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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백범 김구 선생 암살사건

(역사칼럼) 백범 김구 선생 암살사건

  • 기자명 황문권
  • 입력 2017.06.28 19:01
  • 수정 2017.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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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

(서울시정일보 황문권기자)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하 백범)이 은거하던 서울 경교장 서재에서는 한발의 비극적인 총성이 울린다.

백범은 이 총성과 함께 쓰러졌으며 총성을 들은 비서진들은 지체 없이 서재로 달려갔지만 이미 백범은 피를 흘린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위대한 독립투사이자 광복을 맞은 대한민국의 정치 지도자이던 백범에게 총격을 가한 주인공은 놀랍게도 당시 육군 포병사령부의 촉망받던 장교인 안두희였다.

안두희는 군복차림으로 6월 26일 오후 백범에게 문안인사를 하고싶다며 찾아왔으며, 당시 비서진들은 군복차림의 이 청년장교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백범이 있던 서재로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두희는 암살 이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헌병대로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된다. 안두희는 암살 이유를 백범이 남북협상을 통해 정치사회에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며 이에 분개해 암살했다는 이유를 밝혔다.

민족의 지도자로 불리던 백범의 암살에 당시 전국민들은 분노했지만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암살사건을 안두희의 단독범행으로 발표하고 정치적 의견충돌로 인해 우발적으로 범행한 것으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이러한 수사결과 발표 이후 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장례에는 당시 최대인파가 몰려들며 독립투사이자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의 마지막길을 추모했다.

이런 백범의 암살사건은 여러가지 면에서 현재까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꾼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건 자체로도 많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우선 백범의 암살로 이승만정권은 큰 반사적이익을 얻었으며, 반공정권으로서 대북강경책을 주도하며 대한민국 정치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이승만은 남북 총선거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정읍발언(남한 단독선거 주장)을 통해 친미적인 스탠스를 취했으며 결국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남북 총선거 주장을 굽히지 않던 백범과 정치적 대립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승만과 백범의 정치적 승부의 결말이 나오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대립이 한창이던 국제정세 속에서 남북총선거를 위한 미소공동위는 사실상 분단을 위한 명목상의 협의에 불과했고 이미 남북의 분단은 결정된 상황으로 밖에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 군정은 남한단독선거를 결정했고 백범은 상황의 타계를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남북 연석회의를 결정하고 북한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백범이 정치력이 뛰어난 김일성에게 이용당했다고 보는 시각이 다수이다. 이미 미국과 소련 양 강대국들이 사실상 분단을 결정한 상황이었으며, 사실상 당시 북한에는 이미 김일성을 주축으로 정부가 세워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백범은 극렬한 반공주의자였지만 반공주의자이기 전에 철저한 민족주의자였고 민족의 분단은 그의 신념상 지켜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기에 백범은 실패를 알고도 무모한 도전을 감행했고 결국 이용만 당한 채 실패하고 남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백범은 1948년 국회의장 후보로 추천되지만 선거를 자진해 포기하고 제헌의회에서 열린 대통령선거에서도 2위를 기록하며 이승만 정권 출범 후 사실상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

당시에도 백범은 자신의 세력이던 한국독립당 출신들이 남한 단독선거에 출마하면 출당시키는 등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정치적 신념을 분명히 보여줘 많은 존경을 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안두희의 암살 이후 백범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다양한 역사적 시각이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김구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이 존재하고 한쪽에서는 민족주의자로 동학부터 대한민국 정부수립까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위대한 역사적 인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러나 공과를 뛰어넘어 백범 김구선생은 반봉건주의 운동인 동학운동에 참여하고 어떠한 보상도 없이 상해로 건너가 무너져가는 임시정부를 지켰으며 광복군을 창설한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 그 자체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처음과 마지막을 이끈 정치적 지도자로서 해방 이후에도 민족주의자로서 대한민국에서 현재 사라진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준 위대한 지도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황문권기자 hmk0697@msnews.co.kr)

본지 모든 기사 무단전재 금지 / 사진 : 한국학중앙연구원

* 본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 역사인식이 가미된 칼럼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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