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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생각의 융합" ... 인문학은 어떻게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을까

[신간] "생각의 융합" ... 인문학은 어떻게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을까

  • 기자명 황문권
  • 입력 2015.03.1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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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 더숲 | 2015년 03월 04일 출간

[서울시정일보 황문권기자] 이번주의 추천 신간은 "생각의 융합" 이다.   인문학은 어떻게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을까?

 

■시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생각의 점을 잇다!

 

기존의 사고체계로는 더 이상 인간의 미래가치를 만들어내기 힘들어졌기 때문일까.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융합’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러나 모두들 어떻게 상상하고 창조하며 융합해야 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까닭에 ‘융합의 시대’는 그저 구호와 선언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인문학자 김경집은 그의 신작 『생각의 융합』에서 이러한 융합적 사고에 대한 시대적 요구들을 ‘인문학’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저자는 시간과 공간,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단편적 지식들을 심도 있게 연결함으로써, 생각의 깊이를 더하였다. 예컨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와 1592년 임진왜란에 출전한 이순신 장군을 1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만나게 하는가 하면, 한국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같은 듯 다른 역사의 장면들을 목격하게 한다. 이런 지적 자유로움의 과정들은 사고의 영역을 얼마나 넓힐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책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저자가 아들의 셔츠에 적힌 ‘1492MILES’라는 글자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1492’라는 숫자에 반사적으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을 떠올렸으며, 곧 임진년 조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592년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1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콜럼버스와 이순신 장군은 그렇게 조우했다.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새로운 가치를 도출해내는 것, 융합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 책의 시작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서양과 조선의 차이는 유럽의 대항해 시대와 그보다 훨씬 앞서고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명나라 환관 정화(鄭和, 1371~1435?)의 선단과 비교해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정화의 배들은 당시 유럽의 배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였고 승선 인원 역시 비교도 안 될 만큼 대규모였다. 그들이 탄 배는 길이가 137미터, 너비가 56미터, 마스트가 3개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로, 약 1,500톤짜리 배였다.

1402년 명나라의 3대 황제에 즉위한 영락제는 환관 정화에게 서역으로 가는 바닷길을 개척하라고 명했다. 당시 명나라의 북방에서 강성한 티무르 제국이 서역으로 통하는 육로인 비단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해 여러 나라의 조공을 촉구하고 새로이 개창한 명나라의 위력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분명 정화의 대함대는 당시로서는 중국 외에는 꿈도 꾸지 못할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세력 과시’라는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의외로 짧았다. 그 까닭이 해괴하기까지 하다. 전쟁에서 패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중국은 대함대의 배들을 뜯어내고 항해의 기록들까지 다 태워버렸다. 정화의 대항해는 그렇게 일단 막을 내렸다. 역사에서 가정이라는 게 무의미한 일이지만, 만약 정화의 위업이 사위지 않고 계속 이어져 더 강화되었다면 동양과 서양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중국의 해양 강국으로서의 쇠퇴는 세계사에서 대항해의 원조를 정화가 아니라 콜럼버스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그러나 거의 주목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이 있다. 2006년 9월 정화의 배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사실이다. 그 배의 건조는 정화의 항해 600주년을 기념하는 것으로, 중국은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 중국 언론에 따르면 이것은 현재까지 세계에서 건조된 모형 목선 중 최대의 규모라고 한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중국이 대국굴기(大國?起, ‘대국이 일어서다’라는 뜻)를 선언한 상징이며 노골적으로 패권국가로 나아가겠다는 공표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좁은 프레임 안에서 세상을 읽어내고 있다. 일본이 중국이라는 축을 이용하여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는 현실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문제가 더 확연히 드러난다.
- <중국의 정화원정대보다 콜럼버스가 대항해의 원조로 기억되는 이유> 중에서

우리는 천고마비(天高馬肥)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가을을 떠올린다. 그래서 천고마비라는 말을 접하면 왠지 너그럽고 풍요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의 속뜻은 그런 게 아니다. 굳이 찾으라면 유비무환(有備無患)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천고마비에 등장하는 말은 바로 기마민족이었던 흉노족의 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은(殷)나라 때부터 거의 2천 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 등장하는 ‘천고마비’라는 말은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가 활동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 높다’는 것은 가을이 되었다는 뜻이고, 가을은 추수를 하는 계절이다. 농번기도 지났고 수확도 끝났으니 그것은 곧 북방의 흉노족이 기마병 위주의 속전속결 전략으로 침략해올 것이라는 의미다. 그

러니까 하늘은 높아 푸르고 말이 살찔 때는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풍요와 수확의 계절인 동시에 언제 흉노족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두려운 시기다. 그 방비를 제대로 마련해야 한다. 그러니 이 말은 유비무환의 의미를 상기하자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여진족, 거란족과는 다반사로 싸웠고, 몽골족에게는 국토가 유린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만큼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흉노가 쳐들어오는 두려움으로서의 천고마비가 아니라 그냥 가을이라는 계절을 뜻하는 천고마비로만 다가왔을 것이다. 과정과 맥락, 그리고 환경과 처지가 바뀌면 내용도 바뀔 수 있다. - <누구의 시선으로 본 것인가> 중에서

네덜란드 축구는 늘 강력한 인상과 뛰어난 결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거스 히딩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네덜란드 축구와 매우 친근해졌다. 각 나라 축구팀마다에는 고유한 색깔이 있다. 네덜란드 대표팀은 ‘오렌지 군단’으로 불린다. 유니폼의 색깔이 오렌지색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렌지’라는 말은 본디 오렌지 색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에 공을 세운 오라녜 공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의 독립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 이유는 네덜란드가 귀족이나 왕이 다스리던 절대왕조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출판사 서평을 들여다 보자

■인문학자 김경집, 융합의 시대에 새로운 생각의 길을 말하다

상상력이 강조되고 창조와 융합이 요구되는 시대다. 급속한 기술의 진보와 가치의 변화 속에서 인간의 두뇌는 더 이상 속도와 효율 면에서 컴퓨터 알고리즘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기존의 사고체계로는 더 이상 인간의 미래가치를 만들어내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에 학계는 물론, 정부관료나 기업가들 모두 ‘융합’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심지어 교육계에서는 미래의 융합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문과와 이과의 통폐합까지 논의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모두들 어떻게 상상하고 창조하며 융합해야 하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까닭에 그저 구호와 선언에 그치고 있는 상황이다.

인문학자 김경집의 신작 『생각의 융합』은 최근 모든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융합적 사고에 대한 시대적 요구들을 인문학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런 융합적 사고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흥미롭고 다양한 지식과 생각의 이야기들을 통해 엮고 있으며 이런 지적 자유로움의 과정들이 얼마나 사고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기존의 인문서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대부분의 인문서들이 지식을 얕고 넓게 횡으로 나열해왔다면, 이 책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르며 생각의 깊이를 더하고 영역을 넓혔다. 1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을 뛰어넘어 콜럼버스와 이순신을 만나게 했고, ‘자유로운 개인’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렘브란트와 거스 히딩크와의 교차점을 발견한다. 또한 한국의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같은 듯 다른 역사의 장면들을 목격하게 한다.
이 책은 결코 엄청난 지식의 양을 자랑하거나 현학적 지식으로 일관하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다양한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기존에 알고 있었던 단편적 지식들의 연결고리를 심도 있게 찾는다. 그 과정에서 읽는 이들은 새로운 관점과 낯선 진실들을 만나게 되고, 그 길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우리는 새로운 생각의 지도를 갖게 된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각의 융합’임을 발견하게 한다.

콜럼버스와 이순신, 코페르니쿠스와 백남준,
히딩크와 렘브란트, 호메로스와 제임스 조이스, 정약용과 김수영…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생각의 점을 잇다

이 책의 특징은 텍스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다양한 콘텍스트로 엮어보고 해석하는 과정에 있다.
< 1장 콜럼버스, 이순신을 만나다>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해인 1492년과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이 두 숫자의 연결지점을 찾기 위해 두 사건의 시간적 간격인 100년의 시간에 주목한다.


그 시기는 대항해의 시기였다. 그 역사 속에서 총을 지닌 한 포르투갈인이 일본인과 조우하게 되고 일본은 그 총의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결국 조선을 침략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1392년 조선의 건국으로까지 그 사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모든 역사의 순간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 6장 나이팅게일, 코코 샤넬과 푸틴을 만나다>에서는 인간사 최악의 참극이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이 어떻게 여성해방을 이끌었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최초로 간호부대를 이끌고 전쟁에 참전한 나이팅게일과 여성을 억압된 의상에서 벗어나게 한 코코 샤넬을 약 100년의 간극을 두고 ‘전쟁’이라는 교차점에서 만나게 함으로써,

저자는 전쟁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장 통제되고 억압된 형태로 진행되지만, 오히려 그런 과정을 통해 억압과 통제의 두려움에 대한 저항을 이끌어낸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 역사 속에서 상당히 많은 전쟁이 자유와 해방을 낳아왔는데, 우리나라의 임진년 조일전쟁(임진왜란)의 경우도 기존의 질서에 대한 복종적 태도를 누그러뜨렸으며, 해방 이후 치러진 한국전쟁도 반상(班常)의 계급제도를 급속하게 무너뜨렸다고 말한다.

또 저자는 역사, 과학, 신화, 미술, 예술, 철학 등 다양한 인문학 분야들을 아우르면서, 하나의 사건을 그것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새로운 가치를 지속적으로 도출해내려고 했다. 이것은 요즘 말하는 새로운 ‘케미’의 탄생으로, 모든 창의의 시작인 것이다. 이 책이 보여주는 생각의 무한한 확장성은 융합적 사고와 교육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확실한 이유가 될 것이다.

■생각의 융합,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새로운 가치를 도출해내는 것

이 책은 방대한 분량에 비해 많은 소재를 다루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치 한정된 재료를 다양한 레시피로 요리하듯이, 한 가지 소재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탄생하고 그것은 다시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분야에 있어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요즘, 생각의 융합이 현실적으로 더욱더 절실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생각의 융합은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 속에서 예상치 않았던 결론을 추출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그 양으로 따진다면 컴퓨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동안 배운 많은 지식들을 재구성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결론을 얻게 되고 그것은 우리의 호기심과 상상력 속에서 다시 또 다른 데이터가 되어 새로운 결론을 낳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문학은 질문이고 상상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책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이 자신의 아들 셔츠에 적힌 ‘1492MILES’에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듯이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해석이 모두 옳다고, 또는 모두 새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틀을 벗어나려는 꿈틀거림이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앎과 삶은 훨씬 농밀해졌다고 말한다. 끝으로 저자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갇힌 틀에서 벗어나는 꿈틀거림이 나를, 미래를 살려낼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내야 할 용틀임이다. 21세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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