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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칼럼] 이해할 수 없는 광복 74주년의 8월을 보면서

[섬진강 칼럼] 이해할 수 없는 광복 74주년의 8월을 보면서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19.08.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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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물론 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바라는 친일청산의 기준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

박혜범 논설위원

[서울시정일보] 섬진강유역 항일의병과 민족독립운동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에 관련한 서적들을 출간한 촌부의 관점에서, 광복 74주년인 2019년 8월 15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사회에 뜨겁게 일고 있는 반일 감정 속에서, 다시 일고 있는 친일청산의 바람을 보면, 친일청산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모든 친일파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상한 것으로,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과연 정부는 물론 학자들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바라는 친일청산의 기준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심히 우려가 된다.

한마디로 반일 불매운동으로 다시 뜨겁게 일고 있는 친일청산의 기준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사회와 군대에서 특히 태평양 전쟁 당시 부역한 친일파들은 한 명도 없고, 모두가 억울하게 강제 징발 징용 징병된 피해자들이고 애국자들이 돼버리는데, 촌부가 연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왜곡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일본보다 정작 친일청산을 외치고 있는, 우리 한국이 더 심하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언론에 회자되고 있는 일제가 1938년 조선인 학생들과 여성들을 동원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인 보국대에서 해방 때까지 7년을 근무한 박모씨의 경우, 촌부가 연구한 관점에서 보면, 100% 자발적인 입대이고, 그것도 이른바 삼족을 응징해야 할 악질 친일 매국노가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이 벌이고 있는 배상과 친일청산을 보면, 이상해도 아주 이상하다.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려면, 보국대에서 7년을 근무한 박모씨가 자발적으로 일제에 충성한 친일파인지, 아니면 강제로 징병된 피해자인지, 사실을 규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지금 정부와 사회 각계에서 일고 있는 친일청산의 기준에서 보면, 무조건 강제 징병된 피해자라는,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을 하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부연하면 강제징용과 징병은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일제가 실질적인 강제동원령을 집행한 것은 태평양 전쟁 말기다. 즉 1944년 이후이고, 촌부가 당시 강제징용을 당해서 끌려가다 탈출했던 사람으로부터, 직접 청취한 증언에 의하면, 태평양 전쟁 후 그것도 말기라는 건 확실하다.

이와는 반대로 태평양 전쟁 당시 총독부에 거금을 헌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일파로 매도당하고 있는 조선인 기업인들이 총독부에 헌납한 거액의 돈이 자발적인 것인지, 또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거나, 어떤 목적을 숨기기 위한 방편이었는지,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비로소 누구나 승복하는 올바른 역사청산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비록 사실을 규명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지만, 일제 강점기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는,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고 협조한 반면, 반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친일 부역을 했던 것이 또한 사실이기 때문에, 보국대에서 근무한 박모씨가 강제 징병당한 피해자인지, 총독부에 돈을 헌납한 기업인들의 행위가 강제성이 없는 자발적인 것인지를 규명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친일청산은 없다는 것이 촌부의 판단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재벌들이 정권의 지지와는 별개로, 툭하면 청와대에 불러가서, 각종 명분으로 거금을 헌납하고 있는 사실들을 상기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대표적으로 전두환 정권 당시 평화의 댐 건설과 김대중 정권 당시 금 모으기 운동 등등)

지난 세월 촌부가 친일 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묻어버린 섬진강유역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하고, 그 유적들을 보호하려는 일련의 과정에서 생성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보면.......

당시(2005년 전후 9년 동안 집중연구) 촌부가 증언 청취를 대상으로 삼은 세대들은 1915년생부터 1925년 출생한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1920년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의 증언을 가장 중하게 여긴 것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와 해방 당시 즉 태평양 전쟁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세대들이었기 때문이다.

2005년 기준 그때 촌부가 80~90의 나이에 든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으면서 놀란 것은, 일본의 역사 왜곡보다는 우리 자신들의 역사 왜곡이 더 심각했고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고, 한동안 관련된 연구를 중단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알기 쉽게 설명하면, 지금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징용과 징병에 관하여, 내가 들은 증언에 의하면, 세 가지의 부류가 있었다.

첫째는 먹고 살길이 없는 조선 땅에서 벗어나,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속아서 갔든 알고 갔든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으로 돈 벌러 왔다가 혹사당하거나 인신매매된, 동남아여성들과 중앙아시아인들의 사례를 대비하여 보면, 이해가 정확할 것이다.

둘째는 식민지 조선인들은 생각할 수 없는 일본군대와 경찰 등 일본 정부와 사회단체에 참여한 부류들 즉 적극적인 친일파 또는 친일 매국노들이 있었다.

셋째는 태평양 전쟁 말기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 즉 말 그대로 이 사람들이 강제징용 강제징병을 당한 사람들이며, 이들이 진정한 징병 징용의 피해자들이다.

크게 보면 자발적이냐 강제징용이냐는 기준은, 태평양 전쟁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면 되고, 더 정확히는 일제가 패망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전쟁말기부터이니, 당시의 기록들을 확인하면 될 것이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촌부 나름 세우게 된 친일의 기준은, 알기 쉽게 집 대들보 상량문이나 족보 등 지극히 사적인 기록에(인쇄된 신문과 잡지 책 등등은 제외) 소화(昭和 1926년 12월 25일부터~1989년 종료) 즉 일본 히로히토의 연호를 사용한 사람들은, 무조건 친일파가 분명하다.

참고로 만약 어느 사찰의 건물을 중건하면서, 들보 상량문에 “소화”의 연호를 썼다면, 그 건물의 중건을 주관한 주지가 친일파였다고 보면 100% 맞는 말이다.

둘째는 태평양 전쟁 당시 징용이든 징병이든 예를 들어 일본군에 장남인 큰 아들을 보낸 사람들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친일파이고, 차남을 보낸 사람들은 강제로 자식을 빼앗긴 것으로 친일파가 아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을 전장으로 보내려 하겠는가? 특히 장자(長子 큰아들) 우선의 원칙이라는 절대적인 유교문화를 생명처럼 여기고 사는 조선인들의 유별난 가계문화에서 보면, 가문의 손을 이어야 할 큰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것은, 그만큼 히로히토 천왕에게 충성을 한다는 마음속의 징표를 보인 것이고, 차남을 보낸 것은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즉 종손인 큰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차남을 제물로 보낸 것으로 친일파가 아니다.

태평양 전쟁 말기 강제 징집이 집행되기 전 일본군에 입대한 사람들과 가문들은 99,9%는 친일파들이고, 0,1%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는 조직들이, 일본군의 전략전술과 각종 기술 등을 습득하기 위해, 기획 입대시킨 것으로 보면 된다.

이 경우에도 반드시 차남들을 보냈는데, 가서 죽으면 어쩔 수 없고, 만약 살아서 일본군의 계급장을 달고 돌아오면, 독립운동에 유용한 자산이 되었다.

부연하면 나는 친일 인명사전을 대표적인 엉터리 역사왜곡으로 자체를 믿지 않지만, 이들은 일본군 출신들을 모두 친일파로 규정하여 놓고서, 지금은 이들 모두를 강제 징병된 피해자로 만들고 있으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여기서 잠시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움직였는지를 살펴보면, 임진왜란을 실패한 원인이 후방에서 발호하는 의병들 때문이었음을 알고, 다시 재침한 것이 정유재란이었고........

이후 1910년 조선을 식민통치하기 전 7년의 임진왜란을 실패한 원인 즉 호남에서 자생하고 있는 의병세력들을 놔두고는 한일합병을 성사시킬 수 없다고 판단, 1909년(8~10월까지)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북 남원시에 사령부를 두고 군대를 동원 섬진강유역 의병들을(당시 의병 17,779명 전사) 사실상 전멸시켜버렸다.

일제가 중일전쟁 당시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여 놓고서도, 선전선동으로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을 뿐, 강제집행을 하지 못했던 것은, 몇 백 년이 흘려도 불의(不義)를 용납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한민족의 정신을, 역사와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확인하고 있는 연유로, 여차하면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 대동아공영을 실패할까 우려가 되어,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태평양 전쟁 말기 집행한 사례에서 보듯, 일본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치밀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 논쟁이 되고 있는 조국 교수와 이영훈 교수의 논란을 보는 촌부의 의견은, 큰 틀에서 이영훈 교수가 맞고 조국 교수는 틀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점수로 매긴다면 조국 교수는 0점이고 이영훈 교수는 80점 정도는 줄만하다는 것이 촌부의 판단이다.

진정한 친일청산을 주장하고 있는 촌부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관심사항을 직접 연구한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면 진실에 접근할 수 있지만, 겨우 초등학생들이 읽는 성웅 이순신의 영웅전 정도의 수준인 조국 교수가 선동하고 있는 주의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유는 서두에 말했듯이, 정말로 더 늦기 전에 찾아서 단죄해야 할 악질 친일 매국노들을 모두 피해자들로 만들고 애국자들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촌부가 이영훈 교수를 평가하는 것은,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100%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논증을 따라가면 이른바 악질 친일 매국노들을 찾아 단죄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데 비하여, 조국 교수의 주장을 따라가면 단죄해야 할 친일 매국노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이른바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그친다는, 일본의 순사들보다 더 가혹한 가해자인 저들을 피해자로 만들어, 국민들의 혈세로 보상을 해주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조국 교수가 법학 전공자답게 강제동원령이 언제부터 집행됐었는지 그것만 찾았어도,(대법관들 역시 이 부분만 명확히 검증했어도) 이 여름날의 사단은 없었을 것이고, 구역질난다는 표현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알면서도 했다면, 이거야말로 자신들의 실정을 깔끔하게 덮고, 총선을 승리하기 위해서 도발시킨 쇼라고 밖엔 달리 설명되지 않으며, 사실이라면 조국 교수야말로 독일 국민들을 홀려버린 히틀러의 괴벨스처럼, 국민들을 홀리고 있는 문재인의 괴벨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 국민들이다. 400년 전 임진왜란 당시는 물론, 나라가 망하던 구한말 당시, 글을 모르는 국민들이 시국에 관한 정보가 차단된 상황에서, 일제의 선전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로움을 따라 조용히 행동하였는데, 개화된 문명한 세상에서 글을 깨친 국민들이 선동선전에 맥없이 휘둘려버리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이 문제다.

조금 전 방영된 뉴스 화면을 보니, 일본과 일본 국민들을 향하던 무차별한 반일 감정의 표적이 아베정권으로 바뀌는 것 같은데, 이제라도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이다.

부디 이제라도 썩어빠진 정치인들의 선전선동에 휘둘리지 말고, 국민들 각자가 제자리에서 지혜롭고 냉정한 사고로 깊이 생각하고 행동하여, 일본의 국민들 즉 일본의 내부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국민들을 위축시키며 죽여 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섬진강은 안개를 삼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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