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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이사람! 성장현 용산구청장...밥 얻어먹고 살기가 어디 쉽다냐?

[신간] 이사람! 성장현 용산구청장...밥 얻어먹고 살기가 어디 쉽다냐?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9.04.1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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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제대 후 밥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 도착한 곳이 용산이다. 보광동에 학원을 차렸고,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성장현구청장 출판기념회 
성장현 페이스북 캡쳐
책 표지

[서울시정일보]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신간이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이 밥 얻어먹고 살기가 어디 쉽다냐? 라는 제목이다. 다분히 현실적인 제목이다. 제목을 보자면 참으로 직설적이면서도 투박하며, 동시에 치열하고 열정에 찬 삶의 땀방울이 느껴진다. 제목 한 문장을 통해서 인간 성장현, 행정가 성장현이 지닌 정책의 핵심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출간한 출판사는 행복에너지이며 정가는 13,500원이다. 쪽수는 336페이지이다. 4월 9일 출간했다.

성 구청장은 195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군 제대 후 밥을 벌기 위해 무작정 상경, 도착한 곳이 용산이다. 보광동에 학원을 차렸고,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아들들이 또 용산에서 아들과 딸을 낳고, 그렇게 용산은 제2의 고향이 됐다. 정치로 밥벌이를 시작한 것은 1991년 초대 용산구의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다. 또 1, 2대 구의원에 이어 1998년 서울시 최연소로 구청장에 당선됐으며, 2010년 다시 이 자리에 돌아왔다. 이후 내리 3선을 하며 용산구 최초로 4선 구청장 타이틀을 달았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정책의제 형성에 관한 연구」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 『광야에서 부르는 노래』가 있다. 

現) 용산구청장 
現) 서울시구청장협의회장 
現) 전국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장 

깊은 산골, 가난한 농사꾼의 맏이로 태어났으니 눈을 뜨면서 잠들 때까지 모든 것들이 농사와 관련된 일이었다. 글자 공부보다 농사일을 먼저 몸으로 배웠다. 풀을 베고 산에 가서 나무하고, 가마니를 짜는 일까지 농사꾼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어린 시절에 다 배웠다. 주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했는데 어린아이가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아버지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하셨던 말씀이 있다. 

“아이, 남의 밥 얻어먹고 살기가 어디 그렇게 쉽다냐?” 
아버지는 무심코 던진 말씀이었겠지만 야단을 듣는 거 같기도 하고 자꾸 듣다 보니 작은 반항심이랄까 “내가 거지도 아닌데 왜 밥을 얻어먹고 살지? 내가 내 밥 먹고 살면 되지” 하며 그 말씀의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밥’에 대한 개념정립이 안 됐었기 때문이다. 벌써 50년 저쪽의 일이다. 

제대를 하고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쉬운 일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서러움이 배고픔이란 사실도 그때 알게 됐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맨 먼저 “밥 먹었냐? 식사하러 가자.”고 얘기한다. 나에게는 ‘밥’이 곧 인사였고 사회생활의 일부였으며 내가 사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뿐이랴? 겪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먹고 살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옛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격언을 마음에 새긴 채 각자의 위치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하든 넥타이를 매고 일을 하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 하고, 출세하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폼 나게’ 혹은 ‘존엄하게’ 먹고 살아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라는 세종대왕 말씀이 여러 번 등장한다. 대왕은 흉년을 걱정하며 신하들에게 ‘백성의 하늘’을 챙기라고 한다. 백성이 배부르고 등 따뜻한, 태평성대를 만들라고 했다. 왕의 책무와 백성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지만 구청장인 나에게도 큰 가르침을 준다. 

다산 정약용은 “다른 벼슬은 스스로 희망하여 얻어도 좋으나 목민관직은 구하여 얻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나에게는 주민을 보살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강조하는 글귀로 읽혀진다. 목민관이라면 자기가 책임지고 있는 구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그러니까 세종대왕의 말씀처럼 배부르고 등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목민관의 밥값이라는 게 그렇게 무섭다. 구청장을 하다 보니 밥 얻어먹고 사는 것이, 밥값을 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산의 말씀이 더욱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나는 용산에서 구청장직을 네 번씩이나 맡아왔다. ‘구민들을 얼마나 배부르게 했던가?’ 라는 질문 앞에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원칙과 의무를 지키려고 애썼다. 밥을 얻어먹기 위해 밥값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구청 공무원들에게도 “밥값을 하고 살자”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주민이 준 월급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직원들에게도 각자의 처지와 상황이 있다. 하지만 주민들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공무원이 불친절하다고 질책할 수도 있다. 야속한 마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직자로서 그 모든 것을 가슴에 안고 가야 한다. 우리는 이름 그대로 ‘공복’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난 10년간 나와 우리 직원들이 함께했던 밥값의 기록이다. 구정의 기본을 바로 세웠고 아이들을 제대로 키워내려 했다. 다 같이 잘 먹고잘 사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으며 오래된 미래인 역사도 되짚었다. 지역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일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그 결과가 바로 안전하고 행복한 용산 일 것이다. 
“아이! 남의 밥 얻어먹고 살기가 어디 그렇게 쉽다냐?” 
아버지의 말씀처럼 오늘도 나는 밥값을 하기 위해 아침 여섯시에 집을 나선다. 

 ■ 성장현 용산구청장 새 가치를 만들다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밀란 쿤데라의 처녀작 『농담』은 치기 어린 시절 한순간의 실수가 어떻게 인생을 파괴시키는지, 또한 의미로 가득했던 세상이 어떻게 ‘무의미의 장’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묘사했다. 나 또한 한순간의 실수로 10년을 잃었다. 무상의 바닥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의미란 결국 무의미를 안감으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지금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애쓰는 이유다. 

“용산구민의 행복지수가 서울시 1위를 넘어 대한민국 1위가 될 수 있도록 굵직굵직한 지역 현안부터 작은 일까지도 열심히 하는 구청장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지난 민선 6기 출사표의 한 구절이다. 나는 지금도 그 구절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다. 글을 쓰면서 수십 번 반성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문에 용산의 역사를 기술하느라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라야 미래를 논할 수 있다”라는 철학 때문이다. 사실상 모든 역사는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 우리는 역사를 알면, 실패와 과오 또한 최소화할 수 있다. 
풍수지리학의 ‘지기쇠왕설’에 따르면 땅도 사람처럼 기운이 왕성해지거나 쇠약해지며 변화를 거듭한다. 전형적인 배산임수로, 용산은 누가 봐도 ‘명당’임에 분명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오랫동안 외국군 주둔이라는 아픔을 당해왔다. 용산참사와 같은 뼈아픈 일도 경험했다. 기운이 쇠했던 탓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기운이 왕성해질 일만 남은 것 같다. 

우리 용산의 미래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통일 대한민국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시대 중앙역이 서울역이냐 용산역이냐 하는 논쟁이 있는데, 사실 우리 구 입장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어느 쪽이든 이곳 용산에 대륙으로 향할 유라시아 철도 출발역이 생긴다는 뜻이다. 

지금은 무산됐지만 한때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이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청와대를 용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용산에 대한 관심의 소치일 것이다. 
용산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다. 삭풍이 불던 1978년 겨울, 순천에서 탄 서울행 완행열차가 나를 내려준 곳이 바로 이곳 용산이었다. 그 후 40년, 이 땅은 내가 처음 보았던 그때와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곳이 용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 땅을 주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용산이 제대로 평가받을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정치를 꿈꾼 건 1971년, 그러니까 내 나이 겨우 열여섯 살 때의 일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유세 현장을 찾았다가 그의 열변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꿈 많던 소년은 어느새 중늙은이가 되었는데, 당신의 뜻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는지 늘 조바심이 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나름대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가치는 물론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관계 맺음’에 기초한다. 어느 젊은 시인의 글귀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해야겠다.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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