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섬진강칼럼] 인연은 오고가는 인연만이 있을 뿐 인연에는 선악이 따로 없다

[섬진강칼럼] 인연은 오고가는 인연만이 있을 뿐 인연에는 선악이 따로 없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4.20 07:17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은 어제 18일 오전 구례읍 장날의 풍경이다
사진은 어제 18일 오전 구례읍 장날의 풍경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지금 다시 생각하면, 치기어린 시절의 낭만쯤으로 이해되는 웃음만 나오는 일이지만, 아주 오래전 젊어서의 일이다.

서로 지 잘났다며 상대를 배척하는 종교를 이해하면서, 가능하다면 배타적인 종교를 초월하여 보자는 차원에서, 기독교 불교 천주교 3대 종교인들을 축으로, 비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토론이랍시고 내뱉는 끝이 없이 주절거리는 이런저런 소리들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는 일들이 다반사였던 그런 시절의 어느 날......

기독교의 원죄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다가 인간은 본성 자체가 악하게 태어난다는 성악설(性惡說)과 본성이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즉 인간의 선악이 선천성이냐 후천성이냐는 논쟁, 선악의 근원에 대하여 각자 의견을 내는데, 그때 나는 “성악설(性惡說)도 성선설(性善說)도 아니고, 선천성도 후천성도 아닌 그것이 무엇이든 나에게 해가 되어 괴로우면 악(惡)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어 즐거우면 선(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러 반론들이 나왔고, 그 가운데 하나가 그럼 불교의 경전과 이른바 현존하는 큰스님이라 하는 승려들이 법문이라는 고상한 인연법(因緣法)으로 쏟아내고 있는 좋은 선연(善緣)과 나쁜 악연(惡緣)에 대한 정의가 모두 헛소리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네까진 놈이 뭐라고 감히 경전을 부정하고 이른바 깨달은 큰스님으로 소문난 승려들이 정의한 법문을 즉 말씀을 욕되게 하느냐는 공박(攻駁)이었다.

부연하면, 차마 다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좋은 뜻으로 풀어쓰는 글이 그렇다는 것이지, 사실 당시 그 자리의 분위기는 또라이 미친놈 취급이었다.

그때 내가 본래 선악이 따로 없고, 나에게 해가 되고 즐거움이 되느냐는 상황 즉 내가 할 나름 내 마음에 있다는 근거로 제기한 것이 “향을 싼 종이에 향기가 남고 생선을 꿴 새끼줄에 비린내가 남는다.” “똑같은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 등등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예를 든 것이,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데 약을 쓸 돈이 없다. 고민하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옆집 인색한 부자를 찾아가 칼을 들이댄 상황이었다.

설명을 하면, 약을 쓸 돈이 없어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옆집 인색한 부자를 찾아가 칼을 들이대고 몇 푼의 돈을 강탈하고 있는 가난한 부모와, 졸지에 가진 돈 몇 푼을 강탈당하고 있는 인색한 부자, 둘 가운데 어떤 것을 선이라 하고 악이라 할 것이냐는 되물음이었다.

지금도 가끔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져보면, 당시는 물론 지금도 사람들은 칼을 들고 인색한 부자를 협박하여 병든 자식을 살릴 약값을 턴 가난한 부모를 악이라고 규정하는데, 글쎄 정말 그런지 그게 악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병든 자식을 살리기 위해 인색한 부자에게 칼을 들이대며 몇 푼의 돈을 강탈하고 있는 가난한 부모의 행위는 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고, 강도로 변한 이웃에게 몇 푼의 돈을 강탈당하고 있는 인색한 부자에게는 꿈에서도 만나기 싫은 끔찍한 상황인데, 여기서 선한 자는 누구이고 악한 자는 누구인가?

특정한 행위를 옹호하거나 합리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병든 자식을 살리기 위해 부자를 찾아가서 몇 푼의 약값을 강탈하므로 악한 자가 돼버린 가난한 부모와, 졸지에 가진 돈을 강탈당하므로 선한 자가 돼버린 인색한 부자의 상황을 각각의 자리에서 선과 악이 무엇인지, 정말로 이게 선악의 본체인지를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물은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 하였는데, 여기서 독사에게 독은 자신을 지켜 보호하고 생명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편일 뿐, 결코 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흔히들 고상하게 말하는 도라는 것도 아니고 불교라는 것도 아니며 어느 것도 아닌,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나라는 존재를 통해서 오고가는 인연만이 있을 뿐 선악은 없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좋고 나쁜 선악의 인연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이 인연을 따라오는 것도 아니며, 다만 끊임없이 오고가는 인연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바로 지금 내가 부딪히고 있는 상황들이 나에게 해가 되면 괴로워하고 이익이 되면 즐거워하는, 나라는 존재 내가 있을 뿐이다.

구례읍 장날 모습

끝으로 게재한 사진은 어제 18일 오전 구례읍 장날의 풍경이다.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 모두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는 쉼 없는 걸음 속에서, 바로 지금 저마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른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쉼 없이 만들어지고 있을 뿐, 처음부터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따로 없었고, 좋은 인연도 나쁜 인연도 따로 없었다는 것, 이것이 옛 사람들이 전하고 있는 본래 선악이 따로 없다는 말씀의 의미일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