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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왕실의 기록으로 확인하는 역사,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의 멸망과 오늘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섬진강칼럼] 왕실의 기록으로 확인하는 역사,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의 멸망과 오늘의 일들을 알고 있었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3.29 01:50
  • 수정 2021.03.29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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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지난 3월 18일 붉은 홍매가 만개했던 날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전경이다.
사진 설명 : 지난 3월 18일 붉은 홍매가 만개했던 날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 전경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막론하고,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이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를 설명하려면 최소한 200페이지 책 2권은 되어야 할 것인데, 그걸 페북에서 공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혹 단문으로 수없이 쪼개는 연재가 가능하다 하여도, 그거야말로 정확한 사실의 전달이 불가능한 실속이 없는 일이라, 이에 관심 있고 인연이 있는 이들을 위하여, 몇 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하여 공개하려 한다.

다음 2개의 기록은 촌부의 사견이 100% 배제된, 조선왕실의 기록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를 보면 화엄사 각황전이 조선을 창업하는 이유와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더는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1392년(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과 1409년(태종실록 17권) 태종 9년 윤4월 13일 등을 비롯하여, 태조 이성계 본인은 물론 조선왕실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왕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 대표적인 기록들 가운데 하나다.

“어떤 이인(異人)이 대문에 와서 글을 바치며 이르기를, ‘지리산(智異山)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은 것이다.’ 하였는데, 거기에는, ‘목자(木子)가 다시 삼한(三韓)을 바로잡으리라’는 말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시켜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더니, 이미 가버리고 없었다.”

촌부가 설명을 하면, 여기서 이성계가 말하는 이인(異人)은, 대략 540여 년 전 그러니까 847년 지금의 구례군 문척면 오산(鰲山) 정상 바위군락을 의지하고 있는 도선사(道詵寺 현 사성암) 바위굴에서 수도하던 도선국사가 이인(異人 : 스승인 혜철국사)으로부터 천하를 구할 도참의 비기를 전해 받는 과정과, 왕건을 새로운 나라 고려의 왕으로 점지하는 역사를 그대로 가져다 꾸민 것이고.....

이인(異人)이 암석(巖石) 가운데서 얻었다는 비급(祕笈)은, 이른바 인연을 따라 난세인 도탄의 구렁에 빠진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약사여래가 전하고 있는 법화사상의 핵심인 삼승일승(三乘一乘)의 묘법을 그대로 받들어 이룬 역사이며, 이것을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를 창업하는 이성계의 신화로 창작한 것이다.

정리를 하면, 사실상 도선국사 비문의 기록을 인용하여 창작한 것이며, 핵심은 첫 번째 삼국통일을 이룬 사상이 된 원효대사의 삼승일승(三乘一乘)과 두 번째 후삼국을 통일한 혜철국사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모체인 법화경(法華經) 즉 법화사상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고 있으며, 이에 관한 실물이 현 구례읍 섬진강변 오산 도선사(현 사성암)에 현존하여 있다.

사진 설명 : 지난 3월 18일 붉은 홍매가 만개했던 날
사진 설명 : 지난 3월 18일 붉은 홍매가 만개했던 날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처음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던 꿈의 이야기, 즉 이성계가 무너져가는 커다란 기와집에서 서까래 3개를 짊어지고 나온 것은 왕(王)자이며 곧 왕이 될 신(神)의 계시라는 해몽은, 이 오산 암벽에 서서 약사여래가 전하고 있는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하는, 각각의 다른 셋이 하나의 진리를 향하여 나가는 삼승일승과 회삼귀일의 역사와 진리를 가져다 재현한 것이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하늘의 뜻으로 정당화시키는 작업의 차원에서 조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확한 역사다.

다음 역모사건을 다루고 있는 1785년(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3월 16일의 기록을 보면, 이유가 무엇이든 지리산 화엄사 각황전이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촌부의 주장이 결코 헛된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김이용이 신에게 묻기를, ‘구례 화엄사의 중 윤장(允藏)이 일찍이 그 절에 《정감록(鄭鑑錄)》을 숨겨둔 죄로 흑산도(黑山島)에 귀양을 갔는데, 나는 본래부터 그 사람이 문장에 능하고 경서를 잘 외운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정감록》을 나는 비록 직접 보지 못하였으나, 향악이 문양해(文洋海)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 가운데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600년이 지난 뒤에 100년간 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진정비결(眞淨秘訣)》과 《정감록》은 서로 맞아 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른바 삼가(三家)라는 것은 곧 정가·김가·유가인데(鄭、金、劉 三姓) 100년 동안 전쟁을 하더라도 우리들 생전에는 그럴 염려가 없을 것 같다.’라고 하니, 김이용도 또한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부연하면 본래 도참의 비결이라는 것은, 처음 기술한 사람의 관점이 중심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이씨(李氏)의 나라 6백년을 이성계가 출생한 1335년부터 이씨 왕조가 멸망하여 대가 끊겨버린(순종 사망) 1926년까지라 한다면 정확한 것이고, 27대에 걸쳐 집권했던 왕조인 조선의 개국을 기준 한다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으로, 많은 차이가 있어 맞지는 않다.

그러나 236년 전 1785년 당시 정감록에 기술되어 있었다는, 600년의 조선이 망하고 100년 동안 전란을 겪는다는 기록은, 조선이 멸망한 1910년부터 일제 강점과 해방 그리고 6,25동란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 등등 현대사의 관점에서 보면 정확하다 할 수 있으며, 충분히 놀라운 기록이 분명하다.

여하튼 예언서 정감록에 대한 평가는 논외하고, 1785년 역모에 연루된 죄인들의 입을 통해서 밝혀진 정감록의 기록인 이른바 세 집이라는 삼가(三家) 역시 삼승일승(三乘一乘)인 법화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정감록 자체가 약사여래가 오산 암벽에 서서 전하고 있는 한 송이 연꽃이 근본임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며.....

왕실의 공식적인 기록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는 사실은, 이러한 예언을 기록한 ①정감록을 화엄사에서 숨겨오고 있었고, ②화엄사 승려가 그 죄로 멀리 절해의 섬 흑산도로 귀양을 갔고, ③조선이 망한 600년이 지난 뒤에 1백 년간 전쟁이 있게 된다 하였다는 것은,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의 멸망과 오늘 우리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위협으로 대치하고 있는 남북관계와 영호남 갈등을 비롯하여 한일 한중 한미 등등 얽히고설킨 일들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연하면 촌부가 젊어서 본 918년 6월 15일 왕건이 고려의 왕이 된 날로부터 천 년 후 나라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나라와 백성이 셋으로 나뉘어 100년 동안 전란에 빠진다는 기록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데, 촌부가 본 야사를 바탕으로 하면, 음력 1918년 12월 20일(양력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하여 사실상 조선이 멸망하였으니, 1785년 화엄사에서 발견되었다는 정감록의 내용은 촌부가 젊어서 본 오산 약사여래가 전하는 비기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위에서 언급한 정사인 조선왕실의 실록에 기술된 역사의 사실들은, 원효대사와 혜철국사 도선국사로 이어지는 이른바 도참(圖讖) 비기(祕記)를 연구하고 있는 촌부가 밝힌 “화엄사 각황전은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다.”는 제하의 글이 결코 허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끝으로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화엄사 각황전(覺皇殿)의 해석에 대하여, 다시 말하지만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본래 각황(覺皇)은 깨달음의 황제인 부처를 뜻함이고 석가모니를 칭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시대까지는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유생들의 나라인 조선에서는 사대부들은 물론 왕실에서도 사용한 전례가 없음에도, 19대 왕 숙종(肅宗 1661년~1720년)이 석가모니를 칭하는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임금을 깨우쳤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각황(覺皇)을 하사하고, 화엄사가 천년의 역사이며 상징인 장육(丈六)의 이름을 버리고 받아들인 것은, 그만큼 특별하고 중대한 이유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각황전(覺皇殿)에 얽힌 전설도 중요하지만, 불변의 가치인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화엄사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법당을 신축하고 붙인 명칭인 각황전의 각황(覺皇)은 법화경 즉 법화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화엄경의 화엄사상을 지켜오고 있는 화엄사의 입장에서는, 주인과 객이 뒤바뀌는 격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태조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1785년(정조 9년 3월 16일) 당시 역모에서 밝혀진 화엄사에서 숨기고 있었다는 정감록에서 언급되었다는 조선 멸망에 관한 모든 내용들은, 원효대사가 정립하여 삼국을 통일시킨 핵심사상인 삼승일승(三乘一乘)과 혜철국사가 이어 후삼국을 통일 고려를 창업하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전하고 있는, 화엄사 남쪽 섬진강 강변에 자리한 오산 암벽에 서 있는 약사여래의 뜻을 그대로 받들어 실행한 역사의 기술이며, 각황전은 예측된 조선의 멸망을 비보(裨補)하여 막는 목적을 감추고 있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각황전을 건립한 계파(桂坡) 대사를 비롯한 화엄사를 이끌어가던 승려들은 당시에 위에서 언급된 모든 비급(祕笈)의 실체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실들이 1785년(정조 9년) 화엄사에 숨겨둔 정감록으로 얽히는 역모사건으로 이어진 것이니, 화엄사 각황전이 조선의 멸망을 알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는 비보의 목적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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