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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3주년 기념식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3주년 기념식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2.10.25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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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금) 오전 10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중국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안중근의사 의거 103주년 기념식』이 26일(금) 오전 10시,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 대강당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안응모)주관으로 열린다고 25일 밝혔다.

이날 기념식에는 박승춘 국가보훈처 처장, 승병일 광복회 부회장을 비롯한 독립운동관련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의 약전봉독 및 학생대표의 의거의 이유봉독, 숭모회 이사장의 기념식사, 국가보훈처장과 광복회장의 기념사에 이어 장학금 수여, 역사어린이합창단의 안중근노래 합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아울러 기념식에 이어 열리는 안중근의사 유묵석비 제막식에는 텍사스에서 거주 중인 안중근의사의 외손녀 황은실씨가 참석한다.
안중근의사의 옥중 육필을 새긴 유묵석비는 높이 4.3m, 너비 2.6m, 두께 1.1m의 화강암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사람은 멀리생각하지 못하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人無遠慮 難成大業)는 내용을 담고 있다.

◈ 안중근의사 공적 ◈

안중근의사(1879~1910)는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강구 하였으며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 재산을 기울여 삼흥(三興)학교․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회령 등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다시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을 만나 구국의 길을 강구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열(金基烈)․백낙길(白樂吉)․박근식(朴根植)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며 일사보국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1909년 9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으며, 의거 당일(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다 9시경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하여 총을 쏘아 4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주장하였으며,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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