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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광복절 맞이 독립유공자 포상실시

정부. 광복절 맞이 독립유공자 포상실시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2.08.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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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정명여학교 현 교정 사진
[서울시정일보 황문권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15일 제67주년 광복절을 맞아 만주를 거점으로 평안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밀정을 처단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왕경학 선생을 비롯하여 198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포상한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116명(애국장 23, 애족장 92), 건국포장 26명, 대통령표창 56명으로 이 가운데 여성은 7명이며 생존자는 없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67주년 광복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수여되며, 해외에 거주하는 유족에게는 재외공관을 통해 전수된다.

국가보훈처는 일제의 각종 행형기록 및 정보문서, 신문보도 기사 등을 찾아 분석․검토하고, 현지조사를 통해 동일인 여부와 활동 전후의 행적을 확인하는 등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독립유공자를 포상하게 되었다. 특히 금번 포상자 중 21명은 판결문 등 입증자료를 통해 공적내용을 발굴한 후 다시 읍․면․동사무소에서 제적등본, 가족관계등록부 등을 역 추적하여 유족을 찾아 포상함으로써 후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대한민국장 30, 대통령장 93, 독립장 806, 애국장 3,845, 애족장 4,852, 건국포장 990, 대통령표창 2,428명 등 총 13,044명에 이른다.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등과 기존의 사료 수집 공조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해외 사료수집위원들의 협력 하에 국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발굴하는 한편, 지방자치단체와 문화원 등과도 긴밀히 협조하여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을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금년도 제67주년 광복절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목포 시가지를 뒤흔든 정명여학교 7인 여학생들의 함성
1921년 11월 전남 목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나열 등 정명여학교 학생 7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1921년 11월 14일 여학생들은 미국에서 개최되는 워싱턴회의에 조선의 독립문제를 상정할 것을 촉구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교문 밖으로 진출, 목포 시가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수십명이 체포되었다. 정명여학교 만세시위는 3․1운동이 2년이나 경과하여 국내 독립운동이 소강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3․1운동의 독립정신이 민족의 가슴 속에 면면히 흐르고 그것이 목포의 한 여학교를 통해 다시 한 번 분출된 사례이다. 김나열 선생 외에 곽희주․김옥실․이남순․박복술․박음전․주유금 선생 등이 이번에 함께 서훈자 대열에 포함되었다.

▸ 미주 대륙의 4부자 독립운동가, 강명화 선생 포상
1907~1908년 공립협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회원 및 서기, 1910~1912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및 대의회 의장, 북미지방총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여러 차례 다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강명화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등으로 활동하는 등 1910~1930년대 미주 대륙의 대표적 독립운동가로 이름이 높은 강영소(2011,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이 차남, 1904~1945년 역시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강영문(2012, 건국훈장 애족장) 선생이 3남, 192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회에서 활동하고 『국민보』의 영문 주필로 독립운동 선전활동에 종사한 강영각(1997, 건국포장) 선생이 5남으로 이번에 부친인 선생에 대한 포상으로 4부자 가족 모두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 영예를 안았다.

▸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선전하고 상해까지 건너가 활동한 차영호 선생
1919년 3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선전활동에 종사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차영호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3월 중순 경에는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고무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하기 위해 비밀리에 발행되는『독립신문』의 인쇄용지 조달을 주선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의 대외 선전에도 힘썼다. 선생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출옥 후에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해로 건너가 한혈단(韓血團)에 참여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 부끄러운 생존을 거부하고 장렬한 죽음을 택한 의병, 윤종섭 선생
1908년 전남 화순에서 의병장 양회일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한 윤종섭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윤종섭공포충창의발기문」(1923)에 따르면 선생은 “왜적의 침략이 세상을 어지럽게 하자 홀연히 팔꿈치를 걷어 올리고 일신의 가정을 저버린 채 동향 의병장 양회일의 궐기에 뜻을 같이하여 저녁 전투에 임하여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운세가 다하여 뜻대로 되지 않아 쫒기다가 체포되어 장흥헌병대의 감옥에 수감되어 7일간을 식음을 전폐하고 왜병을 매도하는 고래같은 우렁찬 목소리는 쇠와 돌 같았다고 하였다. 몸은 감옥에 갇혀 있으나 독서는 거르지 아니하고 양회일과 함께 같은 날 죽음을 당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활동은 전남 일대에서 활동한 양회일의진의 활약상과 이 의진에 참여한 의병의 애국정신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 서울 한복판에 독립만세 벽보로 일제를 놀라게 한 권각 선생
1940년 9월 서울 한복판에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는 벽보를 써 붙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은 권각 선생께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서울에서 조선문화학원 중등과에 재학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던 중 1940년 9월 28일 사직공원 정문 앞에 설치된 이른바 국세조사 선전입간판에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써 붙여 체포되었다가 옥고를 치르고 1942년 7월에 출옥한 뒤 8개월여 만에 옥고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자료를 구축하고 효율적 통제를 위해 실시한 소위 국세조사를 선전하는 입간판에 조선독립을 촉구하는 구호를 대서한 것에 놀라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 군자금을 모집하고 밀정을 처단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왕경학 선생
중국 남만주를 거점으로 1926년 평안북도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밀정을 처단하다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받은 왕경학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25년 육군주만참의부에 가담한 뒤 제2중대원으로서 이듬해부터 평북 초산과 위원군 일대에서 부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일제의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동지인 박시상(미포상, 행적불명)의 『가출옥관계서류』내용 가운데 경성형무소 복역사실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중국 국민당군 비행장교로 조국독립운동에 참여한 김은제 선생
중국 남경항공대 비행장교로 1933년부터 한국혁명당 당원으로 동 당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연락업무 등의 활동을 펼친 김은제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중국 남경군관학교와 중앙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중국항공대 비행장교로 배속되었으며, 1933년경 한국혁명당 당원으로 매달 군자금을 지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열단 활동에도 관계하여 군자금 모집과 비밀 연락 등의 활동을 펴는 등 조국독립운동의 숨은 공로자였다. 선생은 당시 중국 관내에서 한국혁명당을 이끌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첫째 사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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