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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조선 독립운동의 문을 다시 연 ‘강우규’ 의사를 아시나요?

[역사칼럼] 조선 독립운동의 문을 다시 연 ‘강우규’ 의사를 아시나요?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7.12.0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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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에서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 / 사진 : 중구청 홈페이지
서울역에서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 / 사진 : 중구청 홈페이지

“단두대상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 강우규 의사가 사형 전에 남긴 말이라고 전해지는 시

1920년 조선총독으로 새로이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탑승한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한 ‘강우규’ 의사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에 비해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그러나 일제 36년 치하에서 강우규 의사의 의거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1910년 한반도 강점을 시작한 이후 ‘헌병통치’를 통해 조선 민중을 억압했고 이는 1919년 거국적이인 3.1 만세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3.1 만세운동은 조선을 독립으로 이끌지 못했으며, 일제 치하가 10년 이상 지속되자 독립운동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던 강우규 의사는 당시 66세이던 고령의 몸을 이끌고 새로이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 처단을 결심했으며 이를 실제로 결행한다.

강 의사는 1920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가 타고 있던 마차를 향해 폭탄을 투척했고, 정작 목표였던 사이토 마코토 처단에는 실패했지만 고령의 몸을 이끌고 결행한 이 의거는 조선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강 의사는 의거 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어 이와 같은 말을 남긴다. “나의 평생 나라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이 오히려 부끄럽다. 내가 자나 깨나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청년들의 교육이다. 내가 죽어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소원하는 일이다”

3.1 운동을 잔혹한 칼날으로 짓밟은 일제의 폭력성에 눌려 있던 조선청년들은 강 의사의 의거 이후 다시금 위대한 저항을 시작한다.

강 의사 의거 후 불과 약 두 달 뒤인 1920년 10월 21일 만주 길림성 일대 청산리에서는 김좌진·서일·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일본군에 당당히 맞서 청산리대첩을 이뤄냈다.

또한 김원봉 선생은 의로운 조선청년들을 모아 항일무력단체인 ‘의열단’을 창설해 일제 인사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준다.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를 쫓아가는 것은 청년의 사명이다. 이러한 사명은 현대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불의한 사회구조를 타파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는 청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현실에서 청년들은 생계와 취업 걱정에 찌들어 자신 이외의 것을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이러한 사회를 만든 것이 누구인가?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강우규 의사의 의거에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할 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길 바랄 뿐이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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