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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감정 있습니까?…'갑'의 요구란

[신간] 감정 있습니까?…'갑'의 요구란

  • 기자명 손수영 기자
  • 입력 2017.11.16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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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갖는 다양한 감정. ‘감정’은 일견 개인의 심리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일 감정’, ‘감정 노동’과 같은 사회적 키워드를 생각하면 다분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물성을 지님을 알 수 있다.

'감정 있습니까?'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감정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리되고 축소되고 단순화되어 상품의 하나로 변용된 감정 노동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는다.

감정 노동은 사회의 분위기나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가 아니라 ‘갑’의 요구에 따라 감정을 상품화하는 행위이다.

이에 대해 10장 '얼굴 뒤에 감춰진 감정'을 쓴 영문학자 윤소영은 타자의 얼굴에서 윤리적 요구를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 레비나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본을 걷어내고 가장된 미소 너머에 가리워져 있을 감정을 바라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상품으로 내비치는 서비스 미소 이면에 가려진 진짜 노동자들의 감정이 있다는 것은, 이 책의 제목과도 직결될 것이다.

(몸문화연구소 저 l 은행나무)
(몸문화연구소 저 l 은행나무)

"이와 같이 외부의 자극은 몸에 크고 작은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혈압이 상승하고 호흡이 가빠지는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인 느낌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느낌일까? 스피노자는 삶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에너지(코나투스)의 증가를 기쁨, 그러한 에너지를 감소시키는 몸의 변화를 슬픔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렇지만 똑같은 자극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감정을 느낀다. 슬픔인가? 기쁨인가? 자극 자체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스트레스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캐나다의 생화학자 한스 셀리에(Hans Selye)는 ‘변화를 요구하는 몸의 불특정 반응’으로 스트레스를 정의했다. 여기에서도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 자체가 우리의 느낌을 결정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좌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욱 큰 의욕과 용기를 느끼는 사람도 있다. 똑같은 스트레스가 전자에게 나쁜 스트레스(distress)가 되고, 후자에게는 좋은 스트레스(eustress)가 되는 것이다. 느낌은 해석의 결과이다.(p.18~19)"

"갑작스레 투견이 달려들면 우리는 공포와 놀람, 고통의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주인이 말리기는커녕 팔짱을 끼고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거기에는 수치감, 억울함, 당혹감, 적대감과 같은 사회적 감정들이 추가되기 시작한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같은 도덕적 기준이 개입하면서 감정의 지형이 바뀌는 것이다.(p.26)"

"돌잔치, 결혼식, 장례식 등 삶의 중요한 의례들이 그 의미보다는 온갖 옵션의 더하기/빼기로 이루어진 요식 절차가 된 지는 이미 오래지만, 그것에 반발하는 움직임, 예를 들어 돌상을 직접 차리거나 친한 친구들만을 초대하는 간소한 결혼식 등도 빠르게 자본에게 포섭(co-optation)된다. 즉, 거기에서 생성되는 시장을 목표로 ‘엄마표 돌상’ 전문 이벤트 회사나 ‘스몰 웨딩’ 전문 플래너들이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싫어서 결혼식을 생략하는 커플들이 늘어난다면, ‘노웨딩족을 위한 전문 패키지’가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 포터는 문화 영역에서의 ‘포섭’을 설명하면서, 하위문화에서 고유한 형태의 예술이 등장했을 때 자본을 장착한 주류에서 그 예술 형식의 “거친 부분을 사포로 갈아”내어 “말랑해진 버전”으로 대중에게 공급하는 동안 그 예술의 원래 제창자들은 잊힌다고 비판한다. 요즘 도시 공간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p.57~58)"

"감정의 순수성을 가치로 확립하는 순간 낭만성은 감상성과 혼동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기적 소유욕과도 쉽사리 뒤섞인다. 데이트 폭력에 나타나듯 잔인하고 이기적인 폭력 자체도 감정의 순수성으로 합리화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감정-사랑’으로 이해되는 사랑은 언제든 감정 과잉의 감상주의나 이기적 나르시시즘이나 광적인 소유욕에 불과한, 사랑을 빙자한 폭력으로 쉽게 변질되어버리는 것이다.(p.102)"

"질투는 질투하는 자, 질투의 대상, 그리고 경쟁자라는 3항 구조 속에서 일어나며 여기에는 최소한 질투하는 자가 동일시하는 다른 인격이 있다. 반면에 시기심은 시기하는 자와 시기심의 대상이라는 2항 구조 속에서 일어나며, 이러한 2항 구조 속에서는 시기심의 대상만이 있을 뿐 타자의 인격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개인을 향유에 쉽게 노출시키고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수록, 개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분노에 휩싸이게 되고 자신을 제외한 사회 전체를 시기심의 대상으로도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p.161)

"수치심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사회, 수치심을 병리적인 것으로 여기고 치료하고 도려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회, 수치심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사회를 탈수치심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수치심을 치유하고 억압하고 제거하기만 하면 개인의 자존감이 인정되고, 우울감이 사라지고, 행복하고 명랑한 사회가 도래할까? 물론 사회적으로 타인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억압적 권력 시스템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권력 체계를 비판해야지, 수치심이라는 감정 자체를 근절해야 할 것으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수치심은 타자와의 상호 인정 관계가 근원적으로 우선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회적 감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죄 없는 하위 주체 앞에서 느끼는 윤리적 수치심은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한다. 기쁨, 즐거움, 행복감, 자존감만으로 우리는 삶의 충족감을 갖기 어렵다. 긍정적 감정만으로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기 어려우며, 삶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압력의 의미를 자기 배려의 차원으로 전환하기 어렵다.
--- p.174 

분노하는 자는 불합리한 상황 앞에서 질문하는 자이다. 분노하는 자는 상식적 좋음으로 통칭되는 예의범절과 효, 사회성, 효율성 등의 프레임을 깨뜨리는 이다. 즉 불합리의 원인 제공자에게 다시 질문을 건네며 이제껏 전제되어왔던 침묵의 카르텔을 부수는 이다. 혐오는 불합리의 서사를 구성하도록 한 발신인에게 상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전혀 다른 이에게로 그 부조리의 상처를 수신하도록 한다. 이에 반해, 분노는 불합리의 서사가 개인적 서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회적 구조 안에서 견고화되고 전수되는가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분노라는 파토스는 부조리가 서사화되고 발신, 수신되는 양식이 어떻게 자신을 정체화하고 주체화하는 방식들을 결정하는가를 추적 가능하게 한다.(p.216~217)"

"그렇다면 판매자는 인간적 기준이 적용되지 못하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가? 자기 자신으로서 존중받고 싶다는 것은 자아 정체감의 확인과 인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타자의 얼굴에 직면하는 것은 나의 기득권(재산)을 버림으로써 타자와 동등한 선상에 놓일 때 그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는 감정 노동의 현장에서 지켜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는 것’이라 할 수 있다.(p.293)"

서울시정일보 손수영 기자 hmk06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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