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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독립운동가 이갑(李甲)선생

1월의 독립운동가 이갑(李甲)선생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2.01.02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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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 선생 (1877. 5. 12 ~ 1917. 6. 13)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서우학회, 신민회를 창립하고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노령 망명 후 독립운동 기지개척에 노력한 이갑 선생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선생은 1877년 평남 숙천에서 부친 이응호의 4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적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상동교회 상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주요 인사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자강의식과 함께 정치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립협회 해산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1903년 11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점차 강대해지는 일본의 영향력을 느끼면서 구국의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1905년 일본이 을사늑약을 한국정부에 강요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자 선생은 비밀리에 상동청년회의 애국지사들과 소통하며 애국계몽운동 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재산을 털어 서북학회 조직을 확산하고 오성학교를 건립하였으며 후일 협성학교 건축 비용을 대기도 하였다. 또한 도산 안창호가 주도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다른 군인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907년 군부 교육국 교무과장에 보임되었을 무렵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광무황제가 강제로 퇴위되자 선생은 황제 폐위 반대투쟁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군권까지 장악하자 군부를 박차고 나와 일본육사 출신 군인이었던 유동열, 김희선, 노백린 등과 함께 대한제국 군대를 부활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국내에서 국권회복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망명을 단행하였다.

1910년 신민회 인사들과 함께 망명을 단행한 선생은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여 러시아지역의 기지개척사업을 담당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강제병합의 소식을 들은 선생은 러시아 외교관, 정치가들과 교류하며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언론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페테르스부르그에 한인 청년양성소를 만드는 등 해외 독립운동기지개척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반신 불구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과로와 압박감에 따른 건강의 악화로 활동이 여의치 않았으나 선생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지방총회 본부가 있는 치타로 가서 제2대 총회장에 임명되었다. 동포사회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를 받았으나 악화된 병마로 인한 요양을 위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거주를 옮긴 후에도 선생은 이동휘와 함께 광복군정부를 구상하며 분열된 동포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제2의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선을 갖추어나갔다.

재러한인 동포사회는 의연금을 모집하는 등 선생의 활동에 대한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선생은 1917년 6월 13일 니콜리스크에서 41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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