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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대한 신뢰 - 족자카르타 3일째

그리움에 대한 신뢰 - 족자카르타 3일째

  • 기자명 박용신 논설위원장
  • 입력 2017.11.08 09:16
  • 수정 2017.11.08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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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톤 왕궁과 목욕장 그리고 프람바난 힌두사원-

 

▲ 크라톤 왕궁에 걸린 액자이다. 인도의 대서사시"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왕비인가? 난, 서울 내 왕궁을 지키는 왕비가 생각났다.
▲ 크라톤 왕궁에 걸린 액자이다. 인도의 대서사시"라마야나"에 등장하는 왕비인가? 난, 서울 내 왕궁을 지키는 왕비가 생각났다.

[서울시정일보 인도네시아= 박용신 논설위원장] 족자카르타 여행 3일째 아침이다. 모든 소식이 두절된 이국 땅, 다행이다. 새로운 것들에 집중이 쉽다. 카톡, 까독, 소리도 끊기고, 전화 소리도 멎었다. 의도는 아니지만 어젯밤, 생색낼 선물 사러 마겥에 들렀다가 휴대폰을 타일바닥에 떨어뜨려 액정이 깨져 통화 불능 상태다. 언제처럼 요금폭탄 받지 말고 절대, 국제통화 로밍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은 터, 와이파이 빵빵 터지는 칠성급 호텔이라 그럴 일 없다고 큰소리 쳤는데, 아예, 전화까지 꺼 버린 꼴, 조금은 답답하고 막막한 불안이 인다. 나를 아는 모두와, 지지고 볶던 소소한 서울의 일상과, '약은 챙겨 먹었냐'는 그대의 잔소리도 멎었다. 참, 오랜만에 휴대폰 족쇄에서 풀려 난 통신 절벽의 자유, 독립투사처럼 그걸 제대로 즐긴다.

<술탄왕이 살고 있는 크라톤 왕궁(Kraton)>

▲왕궁 입구다.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의 돈화문과 비교 되었다.
▲왕궁 입구다. 덕수궁, 대한문과 창덕궁의 돈화문과 비교 되었다.

족자카르타 '크라톤 왕궁'으로 향한다. 왕궁이라해서 '거대한' 또는 '휘황찬란'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데, 눈앞으로 다가선 것은 흰 벽, 교도소 경계 담같이 길게 이어진 시멘트 벽이 다가선다. 권위, 위풍이 배제된 너무 수수해서 시시했다. 크라톤 왕궁은 1755년, 자바, 힌두문화를 꽃피웠던 마타람 왕조의 일원인 하멩쿠보노 1세(Hamengku Buwono I)가 건립한 것으로 족자카르타를 통치했던 역대 술탄 왕들의 궁전이다. 술탄은 이슬람교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에 의해 수여된 지도자,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아랍어로는 ‘권력’을 뜻하는 말이다. 현재 이 궁전에는 8대 술탄 왕이 살고 있어 왕궁에 일부만 공개되고 있었고, 관람객 예절에도 신경을 많이 섰다.

▲ 왕궁은 높이 5m 두께 3m의 콘크리트 외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우리나라 교도소 담벽같다.
▲ 왕궁은 높이 5m 두께 3m의 콘크리트 외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우리나라 교도소 담벽같다.

 

▲ 왕궁에 정원이다. 열대지방 답게 바람이 잘 통하는 개방형 아취 창 전각이 이채롭다.
▲ 왕궁에 정원이다. 열대지방 답게 바람이 잘 통하는 개방형 아취 창 전각이 이채롭다.
▲ 단출한 왕궁 내부 건물이다. 궁왕들의 소품을 전시해 놓았다.
▲ 단출한 왕궁 내부 건물이다. 궁왕들의 소품을 전시해 놓았다.
▲ 금으로 도금된 왕실 부속 전각 천장이다.
▲ 금으로 도금된 왕실 부속 전각 천장이다.

흰 시멘트벽을 끼고 아담한 단층 건물들, 우리나라의 궁궐처럼 웅대, 우아하지도 않고 수수하다. 이는 이슬람문화의 영향이라 볼 수 있으나 인도네시아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외세 침략으로 수난 역사의 기인 하지 않았나 유추해 본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힌두 문화권 여러 왕조들이 난립하던 시기를 지나 15~16세기 경에는 스페인, 영국, 포루투갈 등, 힘의 각축장이 되었다가 17세기 들어서서 완전한 네덜란드 지배령에 들어가며 여러 방면의 문화, 건축 등에 영향을 받았고, 1942년부터~1945년까지 3년간 일본 지배 하에 들기도 한 기구한 운명의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한 침략 잔재들로 인해 건축물 또한 쉽게 짓고 허물려도 대수롭지 않은 쪽으로 발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예나 지금이나, 한 나라의 힘, 국력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 왕궁 전시관 내부
▲ 왕궁 전시관 내부
▲ 왕궁 전시관에 전시된 왕의 일가 모형.
▲ 왕궁 전시관에 전시된 왕의 일가 모형.
▲ 역대 술탄왕들이 사용하던 의전용 의자이다.
▲ 역대 술탄왕들이 사용하던 의전용 의자이다.
▲ 전시된 도자품이다, 일본 냄새가 배었다. 지배 3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을 했나 보다.
▲ 전시된 도자품이다, 일본 냄새가 배었다. 지배 3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을 했나 보다.

<물의 궁전, '따만사리(Tamansari)'>

왕궁을 나와 조금 떨어진 물의 궁전, '따만사리'로 향한다. 이 역시 하멩쿠보노 1세가 세운 것으로 크라톤 왕궁에 별궁인 셈이다. 원래 '꽃의 정원'이었던 이 "따만사리"는 왕비나 후궁들이 넓은 목욕장을 지어 사용하고 건물에 복도, 왕실 전용 기도소, 돌 침실 등에도 물이 통하게 하여 '물의 궁전'으로 불린다. 역대 술탄 왕들은 대형 목욕장에서 목욕하는 왕비나 후궁들을 바라보며 그 날, 그 날, 마음에 드는 여성을 간택,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목욕장 구조는 특성상 높은 창이 몇 군데 나 있으며 시멘트을 사용한 벽체에 특유의 무늬를 장식 했다.

▲ 왕비나 후궁들이 사용한 목욕장.
▲ 왕비나 후궁들이 사용한 목욕장.
▲ 목욕장 시멘트 벽체가 중압감을 준다.
▲ 목욕장 시멘트 벽체가 중압감을 준다.
▲ '물의 궁전' 전체 모습. 대형 목욕탕이다.
▲ '물의 궁전' 전체 모습. 대형 목욕탕이다.
▲ 물의 궁전 끝으로 조성된 시멘트 부조 벽문. 외부 지하 사원으로 통한다.
▲ 물의 궁전 끝으로 조성된 시멘트 부조 벽문. 외부 지하 사원으로 통한다.

[프람바난(Candi Prambanan) 흰두사원.]

프람바난 사원, 빛이 사윈 거대한 불꽃 탑들이 먹빛으로 다가섰다. 이건 또 뭐지? 보로부두르 사원의 감동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놀라움'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꽃처럼 타오르던 어느 힌두 시바신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을까? 검은 돌탑 신전들은 꼿꼿하게 자존심의 키를 키워 뾰족이, 결국 하늘에 닿아 구름과 유희하고 있었다. 아!! 사원은 나를 또 한 번, 인간의 능력, 한계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 멀리서 본 프람바난 힌두사원."가루다 만다라"라는 영문이 보인다.
▲ 멀리서 본 프람바난 힌두사원."가루다 만다라"라는 영문이 보인다.
▲ '프람바난' 힌두 사원은 '보로부두르' 사원처럼 또 한번 놀라움으로 다가섰다. 사원 입구.
▲ '프람바난' 힌두 사원은 '보로부두르' 사원처럼 또 한번 놀라움으로 다가섰다. 사원 입구.
▲ 중앙, 힌두 최고의 신을 모신 시바 신전이다. 높이가 47m나 된다.
▲ 중앙, 힌두 최고의 신을 모신 시바 신전이다. 높이가 47m나 된다.
▲ 프람바난 사원에 신전 배치도, 현재 복원은 18개 신전이 복원 되어있다.
▲ 프람바난 사원에 신전 배치도, 현재 복원은 18개 신전이 복원 되어있다.
▲ 족자카르타는 아직도 살아있는 머라피 화산 공포속에 살고 있다. 저렇게 사원을 복원 하더라도 언제 또 잿더미가 될지 모를 일이다.
▲ 족자카르타는 아직도 살아있는 머라피 화산 공포속에 살고 있다. 저렇게 사원을 복원 하더라도 언제 또 잿더미가 될지 모를 일이다.
▲ 신전과 신전 사이, 깊게 침잠하는 천년의 고요, 중생의 사색이 깊다.
▲ 신전과 신전 사이, 깊게 침잠하는 천년의 고요, 중생의 사색이 깊다.
▲ 신전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배수 시설이 갖춰 있었다
▲ 신전은 과학적으로 완전한 배수 시설이 갖춰 있었다

<옛날에 반둥(Bandung)이라는 나라에 마법을 가진 사악한 보코(Boko)라는 왕자 가 살았는데, 속국에 "라라 종그랑(Rara Jonggrang. 날씬한 처녀라는 뜻)"이라는 아름다운 공주가 마음에 들어 결혼해 줄 것을 강요했지요. 그러나, 공주는 그 왕자가 토벌 전쟁 중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임을 알고 결코 청혼을 받아들일 수 없어, 이리 저리 핑계를 대다가 불가능한 묘안을 하나 생각해 내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왕자님! 만약 왕자님께서 하룻밤 안으로 천 개의 신전을 쌓아 주신다면 결혼을 해 드리겠습니다."라고. 그래도 혹시나 미심쩍었던 공주는 만약 1000개의 신전이 완성되면 마을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낼 터이니 그중 하나를 무너뜨려 달라고 약속을 해 놓았지요.

▲ 시바신의 부인,'두르가'가 된 "라라 종그랑" 공주의 석상
▲ 시바신의 부인,'두르가'가 된 "라라 종그랑" 공주의 석상

제안을 받은 왕자는 옳다구나, 마술을 부려 악마들을 동원, 밤새 1000개의 신전을 쌓았는데, 이를 보고 공주는 깜짝 놀라 마을 사람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마을 사람들은 신호에 따라 신전 하나를 무너뜨렸습니다. 얼마 후, 공주의 계략을 알아차린 왕자는 분노하여 공주를 돌, 석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석상을 1000번째 신전으로 삼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프람바난 사원이며 사원 중앙에 있는 시바신전 북쪽 석실에 '두르가' 상이 바로 "라라 종그랑" 공주의 석상이라는 '프람바난 사원'의 전설 이야기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지금도 '프람바난' 사원을 '라라 종그랑' 사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시바 신전은 중앙에 자리하고 양 옆으로, 브라마, 비슈누 신전을 거느리고 있다.
▲ 시바 신전은 중앙에 자리하고 양 옆으로, 브라마, 비슈누 신전을 거느리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시바', '브라마', '비슈누' 3대 신을 모시고 있다. 시바 신은 소(Nandi)를 타고 다니고 브라마 신은 백조(Angsa)를, 비슈누 신은 독수리(Garuda)를 타고 다닌다. 인도네시아의 가루다 항공사 이름의 연유를 알 것같다. 이 '프람바난 힌두사원'에 뾰족한 탑들은 하늘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과 같은 모습으로 중앙에 제일 높은 탑이 최고의 신, 시바 신전이고 그 양 옆으로 브라마, 비슈누 신전이다. 시바 신전의 높이는 47m인데, 실제 그 앞에 서면 원근감을 잊어버려 하늘에 닿은 착각을 느낀다. 동서남북으로 나있는 신전에 계단을 오르면 그 안 석실 안으로 동쪽에 시바 신을 비롯, 남쪽으로는 아가스띠아(시바의 아들=코끼리머리), 북쪽 석실에는 전설에도 나오는 두르가(Durga) 여인상이 있는데, 이 신상이 제일 인기가 높고 그녀는 바로 시바 신의 부인이라고 했다.

▲ 신전의 부조. 섬세한 돌 조각들을 쌓아 맞춤 탑의 신전이 되었다.
▲ 신전의 부조. 섬세한 돌 조각들을 쌓아 맞춤 탑의 신전이 되었다.
▲ 무슨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섬세한 부조가 대단하다.
▲ 무슨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섬세한 부조가 대단하다.
▲ 현지 학생들, 쫄바지, 찢어진 청바지,우리나라 패션과 같다.
▲ 현지 학생들, 쫄바지, 찢어진 청바지,우리나라 패션과 같다.
▲ 시바신의 아들 아가스띠아 지혜의 신 상이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 때가 반질 반질 묻었다.
▲ 시바신의 아들 아가스띠아 지혜의 신 상이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 때가 반질 반질 묻었다.
▲ 시바 신전의 뒷편이다. 저 어마 어마한 돌 무더기들, 언제쯤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시바 신전의 뒷편이다. 저 어마 어마한 돌 무더기들, 언제쯤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 언제쯤 복원이 될지 기약이 없다. 급할게 없는 사람들이기에...
▲ 언제쯤 복원이 될지 기약이 없다. 급할게 없는 사람들이기에...

프람바난, 사원의 신전 군들에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부조들도 보로부두르 사원의 돋을 부조처럼 섬세하고 아름답다. 보로부두르 사원이 세워진지 50년이 지난 약 9세기 경에 마타람 왕조에 의해 축조된 이 거대 힌두사원은 원인도 모르게 왕조가 쇠퇴하며 사람들 관심에서 멀어졌고, 16세기 머라피 화산 폭발과 지진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사원을 1918년이 되어서야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본격 복원이 시작되었다. 거대한 탑 사원의 작은 돌 하나 하나 퍼즐 맞추기는 쉽지 않아 현재, 큰 신전 6개와 측면 2개씩 18개 신전만 복원된 상태이다. 이 18개 신전을 복원하는데 만도 70년이나 걸렸단다. 전설에 나오는 1000개의 신전이 존재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240개 신전이 존재했음이 여러 자료에서 증명되고 있다고 했다. 이 사원 역시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프람바난 사원 앞으로 늘어서 있는 파파야, 야자, 과일 가게들.
▲프람바난 사원 앞으로 늘어서 있는 파파야, 야자, 과일 가게들.
▲ 인도네시아 전통그림자 인형극 소품을 만드는 장인들.
▲ 인도네시아 전통그림자 인형극 소품을 만드는 장인들.
▲ 천에 아교를 녹여 무늬를 놓고 있다. 마을 어느 골목, 바틱 공방에서.
▲ 천에 아교를 녹여 무늬를 놓고 있다. 마을 어느 골목, 바틱 공방에서.

 

<3편 終>
비라도 내렸으면, 걸음이 무겁다. 사원에 검은 석탑 돌들을 머리에 너무 많이 담았더니 생각이 어지럽다. 거대, 장엄함에 주눅 들지만, 어딘가 2%쯤 부족하다. 내 안에 살고 있는 불국사 조그만 주춧돌 하나가 더 아름답고 예술스럽다. 족자카르타, 이제 이별이다. 우리나라 7~80년대 생활 상인데 사람들은 여유롭고 웃음이 많다. 천천히 가 몸에 밴 그들에게서 가이드의 죠크처럼 "빨리, 빨리" 급하게만 달려온 나를 잠시 멈춰 세워본다. 나는 이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발리로 간다. 그 유명한 발리로...

▲ 먹고 싶은 음식에 집게를 찝어 놓으면 해당 음식을 가져다 준다. 아디디어가 반짝인다.
 ▲일본식당에서 퓨전 일식으로 저녘 식사를 했다. 여행에서 먹는 것 또한 즐거움 중 하나다. 해당 음식에 집게를 찝으면 음식을 가져다 준다.

다음 일정, 나는 발리로 간다.▼

(서울시정일보 박용신 논설위원장 bag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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