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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 장희빈의 아들 조선의 국왕이 되다...

경종, 장희빈의 아들 조선의 국왕이 되다...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7.09.30 23:58
  • 수정 2017.09.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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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이 묻힌 의릉 / 사진 : 문화재청
경종이 묻힌 의릉 / 사진 : 문화재청

경종은 조선의 제 20대 국왕으로 선왕인 숙종의 뒤를 이어 1720년 즉위했으나 불과 4년만인 1724년 36세의 나이로 승하한 비운의 국왕이다.

우리에게는 장희빈의 아들로서 잘 알려져 있으나 재위기간이 4년에 불과하고 특별한 치적이 없어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동시에 낯설은 이름이다.

경종의 탄생은 축복 그 자체였다. 당시 모친인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숙종은 첫 아들의 탄생을 너무나도 기뻐했다. 그래서인지 출생 불과 100일도 안되어 원자책봉을 받았으며, 원호를 정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이 대거 실각하면서 남인이라는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도 얻게 된다.

그러나 경종의 불행은 예고된 것이었다. 부왕인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배경으로 환국정치를 펼쳤고 결국 1694년 남인이 대거 몰락하는 갑술환국이 벌어지면서 모친인 장희빈과 정치적 후원자인 남인이 몰락한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경종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해줄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와 같은 자신의 외척세력이 일거에 사라진 것은 큰 타격이었다. 게다가 불과 경종이 14살일 때 모친인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를 당하면서 죄인의 아들이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이후 경종은 시련의 나날을 견디게 된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둘로 나뉘어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세자를 폐위하고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으로 나뉘었으나, 노론이 세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시 노론은 세자의 모후인 장희빈을 사사한 만큼 복수를 우려해 경종을 어떻게 해서든 폐위하려 했고, 경종에게 폐위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은 숙종이 지병으로 몸이 안 좋아지면서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그러나 이 대리청정에는 모종의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숙종이 노론 4대신 중 한명이던 이이명과 독대 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대리청정 과정에서 경종이 실수를 한다면 곧바로 연잉군으로 세자를 교체하겠다는 숙종과 노론의 합작품이었다. 당시 경종은 아버지인 숙종이 보기에도 결격점이 많은 후계자였다.

우선 숙종 자신은 모친인 명성왕후 김씨의 든든한 외척세력과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정통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누린데 비해 경종은 외척세력이 한미한데다가 그나마도 제거됐으며 본인의 건강 또한 좋지 못했다.

그러나 경종은 이와 같은 상황을 이겨낸다. 대리청정 당시 경종은 신하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신하들의 뒷담화를 들어가며 극도로 말을 아껴 자리를 보존한다.

결국 경종은 숙종이 승하한 1720년 조선의 제 20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그의 불우한 인생은 국왕이 되어서도 여전했다.

당초 노론은 장희빈의 사사를 주도한 이유 때문에 경종이 즉위하게 되면 큰 보복이 있을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경종은 어머니를 죽인 그들을 쉽게 처벌하지 못한다. 경종의 지지세력인 소론의 힘이 약한 반면 노론이 조정과 군부의 요직을 여전히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종 본인의 건강이 매우 안 좋았으며,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숙종과 달리 자신은 정궁 출신도 아닌데다 어머니가 사사되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어찌나 왕권이 약했던지 노론 대신들은 경종의 건강이 악화되자 직접 궁궐로 들어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면전에서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종의 나이가 30대임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요구했으며 이를 관철시킨다.

그러나 경종은 단 한번 자신의 왕권을 행사한다. 그 사건이 바로 신임옥사이다. 이 신임옥사는 앞서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대신을 탄핵하는 김일경의 상소로 시작된다.

이후 짜여진 각본처럼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는 ‘묵호룡의 고변’이 들어왔고 경종은 이를 통해 명분을 얻어 피의 복수를 시작한다.

자신을 세자시절부터 끌어내리려 시도하고 왕이 돼서도 면전에서 대리청정을 요구한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을 모두 사사했으며 조정과 군부 내에 노론인사를 대거 숙청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대로 건강이 좋지 못한 경종은 자신의 후사를 보지 못했고 자신의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소론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준다.

경종은 결국 불과 재위 4년 만인 1724년 창경궁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편안하지 못했다. 그의 사인이 계속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것이다.

평소 건강이 좋지 못했던 경종은 몸져 눕는 날이 많았고 게장과 감을 먹고 나서 탈이 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다. 이 과정에서 연잉군(영조)이 인삼차와 부자(약재)를 올리고 경종은 이를 복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이를 두고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영조 시대 소론 강경파의 반란인 ‘이인좌의 난’에서는 반란군이 경종의 상복을 입고 한양으로 진군하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경종은 이렇게 어머니 장희빈이 죽은 이후 평생을 불운과 스트레스 속에 살았다. 경종의 건강문제는 이런 스트레스가 주요한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당시부터 떠돌던 소문인 불임문제도 실제라면 이런 스트레스가 큰 원인이었을 것이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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