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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다혈질 국왕 숙종.. 강력한 왕권을 꿈꾸다...

조선 최고의 다혈질 국왕 숙종.. 강력한 왕권을 꿈꾸다...

  • 기자명 황문권 기자
  • 입력 2017.09.29 00:51
  • 수정 2017.09.29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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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어진
숙종어진

 숙종은 조선 제19대 임금으로 전체적으로 왕권이 약했던 조선에서 강력한 왕권을 누린 몇 안되는 국왕 중 한명이다.

숙종은 아버지 현종과 어머니 명성왕후 사이에서의 외아들로 태어나 즉위한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국왕이었다. 철저한 유교사회 장자계승 원칙 아래서 장남으로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점은 그가 재위기간 내내 강력한 왕권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숙종은 어린 시절부터 외아들로 태어나 금지옥엽으로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배경에는 효종 때부터 왕실에 손이 귀해졌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숙종의 아버지 현종은 효종의 외아들이었으며, 현종 역시 아들을 숙종 외에는 두지 못한다.

숙종은 어린 시절부터 불같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는 숙종을 두고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숙종은 이런 어린 시절을 거쳐 나이 14세에 부왕인 현종이 승하하자 즉위한다. 여기서도 이색적인 점이 등장한다. 숙종이 나이 14세에 수렴청정 없이 바로 친정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타고난 정통성을 바탕으로 권력을 잡은 숙종은 46년에 걸친 재위기간 동안 그의 불 같은 성격에 관한 많은 사건과 일화를 남긴다.

그 첫 번째 사건은 바로 ‘기름천막 유용사건(경신환국)’ 이었다. 숙종 6년이던 1680년 숙종은 당시 갑인예송 이후 집권정당이던 남인의 영수 허적에게 궤장을 하사한다. 여기서 궤장은 노신에게 주는 지팡이로 이를 하사 받는 것은 신하로서 최고의 영광이었고 허적은 이를 받고 기뻐한 나머지 집에서 잔치를 벌인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사건이 터지고 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당시 허적은 집안 잔치를 위해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름천막’을 무단으로 가져다 사용했고 잔치소식을 듣고 이를 빌려주려 하던 숙종은 이미 허적이 허락 없이 이를 가져다 쓴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분노한다.

분노한 숙종은 당일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 주요 인사들을 대거 교체했으며, 불과 보름 동안 조정에서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복귀시킨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이 들어왔고(삼복의 옥) 이 결과로 허적과 허견, 윤휴 등 남인의 거두들은 모두 처형당하고 만다.

물론 경신환국의 배경이 전적으로 ‘기름천막 유용사건’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당시 남인은 조정 내 주요관직과 군권을 장악한 상태로 숙종은 남인을 이전부터 부담스러운 정국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두 번째 사건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희빈과 연관이 있는 숙종 15년에 벌어진 기사환국이다. 당시 숙종의 정실부인인 인현왕후는 서인 명문가의 여식이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다.

이와 중에 숙종이 총애하던 장희빈이 아들(훗날 경종)을 생산한 것이다. 당시 장희빈은 중인 출신으로 서인집안의 여식이던 인현왕후에 대항하기 위해 경신환국 당시 밀려난 남인과 손을 잡아 서인과 반대 입장에 선다.

이러던 중 화끈한 성격을 가진 숙종은 고대하던 아들이 태어나자 이례적으로 100일도 안되어 종묘에 데리고가 선조에게 고하고 원자로 책봉했다. 그러자 집권당이자 인현왕후를 지지하던 서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에 크게 분노한다.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인조-효종-현종-숙종 4대를 섬긴 노신이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데 이어 김수항과 김수흥 등 서인 명문가 출신 노신들에게도 사약을 내린 것이다. 결국 숙종의 분노로 집권한 서인은 다시 숙종의 분노로 정권을 잃게 된 것이다.

세 번째 사건은 ‘장희빈의 비극적 죽음’으로 알려진 ‘갑술환국’이다. 숙종 20년이던 1694년 기사환국을 통해 집권한 남인과 밀려난 서인은 서로를 역모고변으로 모함하고 있는 실정이었고 숙종은 갑자기 서인의 손을 들어준다. 결국 숙종은 기사환국 당시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결정하고 왕비 자리에 올랐던 장희빈을 빈으로 격하시킨다.

이 사건은 1701년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점으로 조선정치사에 중대한 획을 남긴다. 바로 ‘무고의 옥’이다. 인현왕후의 죽음에 장희빈의 무고가 원인이라는 이 사건으로 남인은 대거 숙청당하고 사실상 재기불능의 피해를 입는다.

우리가 자주 보는 드라마 속에서 숙종은 장희빈을 사랑해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숙빈 최씨를 사랑해 장희빈을 죽인 일종의 성격 이상한 로맨티스트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숙종은 다혈질에 냉철함 그리고 과단성을 갖춘 냉혈한 군주였다.

그렇다면 이런 숙종의 치세가 우리 현실에 던져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숙종의 환국정치는 조선 붕당정치의 붕괴를 가져왔다. 조선 초기 훈구파를 몰아내고 집권한 사림파는 붕당을 통해 대화와 토론이 있는 타협의 정치를 이어왔고 이는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 대 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숙종의 다혈질 성격을 기반으로 한 환국정치는 정쟁에서의 패배는 곧 죽음이었고 이는 대화와 토론이 아닌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극단의 정치로 변질된다. 결국 붕당정치의 붕괴는 영·정조 시기 노론 일당독재를 넘어 세도정치로 변질됐고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현대의 정치상황은 어떨까? 우리 시대에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상생의 정치가 이뤄지고 있을까? 숙종 시기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의 극단적 환국정치가 몰고 온 결과를 우리 현대의 정치인들이 한번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 본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 역사인식이 가미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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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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