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라이벌.. 광해군과 인조.. 동생의 복수를 위해 반정을 일으키다..
역사 속 라이벌.. 광해군과 인조.. 동생의 복수를 위해 반정을 일으키다..
  •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 승인 2017.09.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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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 묘 / 사진 : 문화재청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 묘 / 사진 : 문화재청

광해군은 조선왕조의 15대 국왕으로 뒤 이어 즉위한 인조와 삼촌과 조카 사이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차남이며, 인조는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의 장남이다.

삼촌과 조카 사이인 이들은 조선왕조 최대의 전란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운명을 바꾼다. 광해군 15년이던 1623년 인조(능양군)는 당시 집권세력이던 북인에게 밀려 위기의식을 느낀 서인과 손잡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 내고 조선 제16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은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이동해 67세를 끝으로 한 많은 생을 마치게 된다. 그와 함께 집권했던 북인 세력 역시 함께 몰락했으며, 이들은 이후 조선왕조 멸망까지 중앙 정계에 다시 진출하지 못한다.

둘 사이의 악연은 광해군이 당시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을 역모로 죽이면서 시작된다. 광해군 7년이던 1615년 능창군을 왕에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신경희의 옥사)이 있었고 결국 능창군은 강화도로 위리안치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 역시 홧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와 관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광해군에게 능양군과 능창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려있다는 말이 들어가면서 시작된 역모사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정원군의 집터에 1623년 광해군이 경희궁을 완공한다.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인조는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한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의 견제를 받던 세자시절은 물론이고 집권 내내 불안감이 가득했다. 광해군의 어머니는 선조의 정식 왕비가 아닌 공빈 김씨로 후궁이었으며, 게다가 그는 공빈 김씨의 소생 중에서도 차남이었다.

이는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조선에서 국왕으로서 치명적 약점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의 집권시기는 조선 최대 전란이던 임진왜란 직후였다. 피폐된 민생경제와 돌아선 민심은 가뜩이나 정통성이 약한 광해군의 집권동력을 약화시켰다.

또한 그의 정치적 지지세력이던 북인은 퇴계와 율곡의 학맥을 이은 서인이나 동인과 달리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결집력이 약한 소수정당이었다. 결국 이런 배경들은 광해군에게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고 인조반정의 배경으로 작동한다.

결국 광해군은 선조의 적장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폐모살제’를 일으켰고 이는 인조와 반정세력들에게 가장 큰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으며, 왕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무리한 궁궐공사는 민심을 배반하게 했다.

이를 등에 업은 인조는 서인 강경파이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최명길 등과 반정 계획을 논의했으며, 결국 광해군 15년이던 1623년 3월 21일 홍제원에서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이귀를 호위대장으로 삼아 삼촌이던 광해군에게 칼을 겨눈다.

인조는 반정과정에서 함께 계획을 모의했던 종친 이이반의 고변으로 계획이 노출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궁궐 내에는 이미 함께 반정을 모의한 훈련대장 이흥립이 궁궐경비를 맡고 있었고 이를 통해 쉽게 궁을 장악한다.

광해군은 고변을 듣고도 연회에 빠져 이를 무시했다고 전해지나, 실상은 연회가 아닌 잦은 역모 고변과 이어진 옥사에 염증을 느낀 광해군이 이를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실수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은 반정군이 궁을 장악하자 탈출해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대피했으나, 날이 밝고 결국 반정군에 의해 체포된다.

인조는 체포한 광해군을 서궁에 유폐 중이던 인목대비 앞에 무릎 꿇려 모욕을 줬고(광해군은 인목대비보다 9살이 많다) 이후 강화도로 유배한다.

결국 인조는 이렇게 자신의 동생을 살해한 삼촌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났고 인조는 조선의 제16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이후 광해군은 유배된 제주도에서 자신의 무덤을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묘 근처에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끝으로 한 많은 67년 간의 생을 마친다.

그러나 복수에 성공한 인조 역시 순탄치 않은 인생을 살았다. 그는 즉위 초부터 광해군을 다시 옹립하려는 세력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고 반정의 명분을 살리기 위해 광해군과 반대되는 외교정책을 쓰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을 조선에 다시 끌어들인다.

또한 인조는 이 두 번의 호란 이후 실추된 왕권을 살리고 왕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장남 소현세자와 며느리인 강빈 그리고 장손인 경선군을 죽여야 했고 결국 현대에 와서는 조선사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암군으로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다.

역사는 반복되며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도 언젠가는 역사 속에 담겨진다. 조선 백성들의 최대 비극이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사이에서 백성을 보지 않고 권력을 중심에 두고 정치를 했던 두 라이벌의 비극적 결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정치란 민생이고, 민생이 정치이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본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역사인식이 가미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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