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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으로 가는 행복역(幸福驛)"-정동진 야간 열차를 타다.

"그리움으로 가는 행복역(幸福驛)"-정동진 야간 열차를 타다.

  • 기자명 박용신
  • 입력 2017.09.11 20:26
  • 수정 2017.09.2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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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 정동진 야간 열차를 타다.

▲ 동해 바다. 해가 오른다. 가슴 벅차게 해를 안는다. 그대 곁이어서 행복한 시간.

 

[서울시정일보, 동해 = 박용신 논설위원장]
불현듯, 밤 기차에 몸을 싣는다. 일상의 고뿔처럼 잔기침이 잦아지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그리움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기어코 길, 떠나야만 하는 보헤미안의 외로운 집시, 이번 여행의 종착지는 동해바다 행복역이라 하자. "그리움으로 가는 행복역(幸福驛)", 켜켜이 가슴에 쌓였던 그 많은 그리움과 허기진 보고픔들을 정거장 마다 조금씩 이별을 하고, 너무도 아파야만 했던 시간들을 이제는 잊자. 파도가 멈춰 선 고요의 새벽 바다에 서서 텅 빈 가슴으로 붉게 솟아 오르는 둥근 태양을 벅차게 안아 보자. 그대와 함께 한 이소중한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움의 종착역 정동진(正東津)에서!

#먼동이 터오는 새벽,산과 강과 관목의 숲이 잠을 깨려한다.

밤, 23시25분 정동진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가 움직인다. 청량리역을 출발한 야간기차는 어둠 속에서 여행자들의 설레는 마음을 보았는가? 숨가쁘게 달려 간다. 차창 밖으로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때론, 멧새가 잠든 관목의 숲도 지나고, 때론 검은산 언저리, 호롱불 밝힌 산촌의 초막도 지난다. 세상 안부가 궁금한 간이역은 외로움이 깊고, 터널을 지나니 허허로운 벌판이 다가선다. 산과 산 사이 모호한 경계(境界)를 구분하듯, 야윈 강이 하얗게 누워서 실뱀처럼 흐르고, 이리 저리 마주한 의자에 두 발을 걸치고 태평하게 곤 잠에 들어 코까지 고는 자유의 영혼들, 깊은 밤 여유가 좋아서 헛기침 두어 번, 나도 뒤척이며 잠을 청해 보지만 잠자리의 낯 섬이 두 눈을 더 말똥이게 한다. 어쩌다 멈춰 선 정거장엔 오가는 이 없고 선로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만 처연한데, 물방울 얼룩진 차창으로 사선을 긋는 빗줄기, 언제부턴가 비가 오고 있었나 보다. 차창 물방울 얼룩 너머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미소를 짓는다. 왠지 그냥 '펑펑' 울어 보고 싶은 밤, 그는 기분 언짢게 웃고 있다.

# 싱그런 숲, 단아한 역사가 정겨웁다. 친절하게도 5시 28분에 해가 뜬다고 안내 표지판을 설치했다.

정동진역, 아직은 미명(未明)이다. 그렇게 오고 싶어 했던, 그리움으로 닿은 행복역, 이 곳에서 오랜 나의 그리움들의 종지부를 찍고 나는 행복을 만날 수 있을까? 바다로 나아갔다. 모래사장 끝에 서서 '와락'달려드는 파도에 한쪽 발을 점령 당했다. 덩달아 어지러웠던 발자국도 씻기어 가고, 부지런한 어부의 통통배 하나 멀리 수평선 너머로 빠르게 사라진다. 서서히 들어나는 광활한 바다. 비 그친 시선의 끝으로 하늘과 바다가 만나 남과 북의 경쾌한 선을 끗고, 부딪쳐 부서질 언덕도 없는 파도는 또 세차게 달려와 애꿎은 내 발 한쪽 마져 덮쳐 버렸다. 새벽 바다에 어쩔 수 없는 발목 입수, 상견례 인사가 짓궂다. 잔잔해 지면 너무도 밍밍한 바다, 나는 모르겠다. 그대가 왜 저 개성도 없는 정동진 바다를 그토록 좋아 했었는가를, 흐려진 바다에서 바램대로 둥그런 큰 해를 안지는 못했지만, 맨질한 모래 바닥에 퍼 질러 앉아 비릿한 바다 냄새를 실컷 맡는다.

#새벽 바다에 공짜로 즐기는 알싸한 공기, 그리고 비릿한 바다 냄새.

# 다시 정동진에 가 저 벤치에 앉고 싶다. 바다를 바라보며 옛날 얘기 하고 싶다.

학창시절 드라마 "모래시계"의 동질감으로 밤 열차를 타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정동진 역, 예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는데 첫사랑의 그대는 보이지 않는다. 고현정이 기대 앉아 울분을 달래던 소나무가 제법 키를 키웠다. 언제부턴가 욕망이 다한 나의 젊음의 바다에서 희망 건지기 노래는 이미 끝난지 오래다. 될수록 바다의 품에서 편하게 마음을 다독이고 파도 소리에 묻어온 소라의 노래를 들으려 애쓴다. 푸르게 무심으로 바라다 보이는 넉넉 안에서 휴식에 드는 일, 그대에게서 그만했으면 되었다는 위로의 소리를 들으며 아직은 잔잔한 바다, 인생사(人生事) 수 많은 해일의 파도를 견디어 온 내가, 오늘은 그래도 이 행복역, 그대 곁에서 대견스럽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드라마 "모래시계(1995)"에서 고현정이 역구내를 걸어가고 있다. 현재의 소나무.

 

#벗이여, 바른 동쪽, 정동진으로,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 해를 보았는가. 신봉승의 정동진 시비와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갈까? 나처럼 바다로 갈까?

#나를 정동진에 데려다 준 무궁화호 열차. 왜 나는 기차만 보면 마음이 설레일까?

#정동진~삼척간 해변으로 달리는 바다 열차.

 

#레일 바이크 전체 노선 5.1 km 50분이 소요된다. 예약 필수

#역구내 카페. 생각보다 커피값이 비쌌다.

어느새, 날이 맑게 개어 단아한 빨간 지붕에 작은 역사(驛舍)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진다. 방금 도착한 무궁화호 열차에서 삼삼오오 사람들이 내리고 더러는 바다가 보이는 역구내 벤치에 앉아 바다를 보고 더러는 바쁘게 개찰구를 빠져 나간다. 늘 꿈속에서 그리던 밤 기차 여행을 실행에 옮기고 드디어 바다에 닿아 즐거워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들, 모두가 설레임으로 찾아 온 작은 역사가 오늘은 참 부산하다. 간혹 해변을 달리는 레일 바이크가 "까르르" 웃음이 넘치는 가족들을 싣고 해변의 송림 속으로 달려간다.

#역광장에서 문화공연이 있었다. 열두 발 상모를 돌리는 극단 배우의 묘기.

#여행객들과 함께하는 문화행사. 사물놀이 굿(GOOD)판. 전국 각 간이역 순회 공연을 코레일이 유치했다.

<終>
그대! 외로운가? 바다에 가자. 그리움으로 가는 어둠의 야간열차를 타고. 만원 객차에서 사람냄새 부대끼며 낯선 이와 악수도 나누고 김밥 몇 줄, 삶은 계란 몇 개, 정으로 나누고, 푸른기차에서 그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바다에 가자. 바다는 가난한 자들의 보고(寶庫),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빚을 내지 않아도, 마음 것 가슴에 바다를 담을 수 있다. 바쁘다는 핑계는 이제 그만, 푸른 바다에 가서 두 팔을 벌리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자. 하여, 마음이 후련해 지면 다시 세상에 오자.

#그대가 돌아서 뒷모습을 보이드라도 결코, 안녕이라 말하지 말자. 세상사 돌고 돌아 또 만날 테니까.

서울시정일보/논설위원장

여행문학가

백암 박용신의 "풀잎편지"

(Photo Healing Essay)

기사등재. 2017.9.11

(박용신 논설위원장 bagam@hanmail.net)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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