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과연 보수주의자인가?
(역사칼럼)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과연 보수주의자인가?
  • 황문권 <hmk0697@msnews.co.kr>
  • 승인 2017.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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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선 말기의 왕족으로 세도정치를 단절하고 서원철폐, 호포제실시 등을 이뤄낸 고종의 생부이다.

흥선대원군이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본관은 전주, 자는 시백, 호는 석파이며, 남연군의 4째 아들로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후손이다. 조선 왕조 통틀어 유일하게 살아있는 대원군으로 아들로 흥친왕 이재면, 고종을 두었다.

우리는 평소 흥선대원군을 국사 교과서 속의 인물로 기억한다. 근현대사 파트의 첫장을 장식하는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외세와 단절한 채 봉건적 개혁을 주도한 정치인으로 교과서 속에서 묘사된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외세를 배척하는 척화비를 전국 곳곳에 세우고 당시 셰계 정세에 역행하는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펼쳤다.

게다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에는 열악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봉건식 군대로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본 흥선대원군의 모습과 실제 역사 속의 모습에는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흥선대원군은 기본적으로 쇄국정책을 주도할 만큼 보수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비록 흥선대원군의 내정적 정책은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현대에는 받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혁신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대표적 업적으로 인정되는 서원철폐는 당시 조선왕조 500년의 사상적 틀을 깨부순 일대 혁신이었다.

또한 1871년 대원군이 단행한 호포제양반은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조선왕조 500년 신분제의 전통을 깬 일종의 탈 봉건적 개혁안이었다.

아울러 대원군은 서양과학기술 수입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은 기록으로 증명이 된다. 대원군은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에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비록 결과론적으로 실패했을지언정 서양과학기술을 통해 군사력 발전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면제배갑화륜선이다. 면제배갑은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일종의 방탄복으로 병인양요 후 서양의 총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대원군이 개발한 군수용품이다. 김기두와 안윤이라는 인물이 대원군의 지시로 개발을 시작했는데 12겹의 삼베를 겹쳐 실제 조총 실험에서 효력을 입증하기도 했다.

이 면제배갑이 실제로 사용된 사례는 신미양요 당시 참전한 미군의 사진자료에 담겨져 있으며, 미국은 여기서 획득한 면제배갑을 1893년 한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엑스포에 전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대부분이다. 우선 당시 면제배갑의 성능테스트에는 당시 사용되던 후장식 소총이 아닌 조총으로 했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남아있는 면제배갑을 들여다보면 매우 두껍고 더위에 취약해 실제 착용하고 전투에 임할 경우 활동성을 크게 저해했을 거라고 분석된다.


▲ 면제배갑의 실제모습

대원군은 또한 화륜선개발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대원군은 청나라에서 들여온 해국도지를 기반으로 목탄증기갑함이라는 배를 만들어 실제 전쟁에 활용하려한 것이다.

이 배는 당시 증기기관을 사용하던 서양배와 달리 목탄으로 동력을 확보하고자 했지만 연료의 동력부족으로 결국 얼마 움직이지 못했으며, 이 광경을 지켜본 대원군은 분노해 배를 부숴버리라고 명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원군이군사적 기술 이외에는 쇄국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배경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숨어있다. 바로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오페르트 도굴사건이다.

혹자는 도굴사건이 나라의 정책을 바꿀 정도로 큰 사건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철저한 유교사회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남연군은 대원군의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바로 고종의 친조부이다.

유교사회에서 군주는 현대사회의 집권자와 다른 의미이다. 현대사회 속 집권자에게는 정치적 의미만이 부여되지만 유교사회의 군주는 가족적 개념이 함께한다.

군주는 백성의 아버지이고 백성은 군주가 살펴야할 자식이다. 결국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전 백성의 아버지의 친조부 무덤을 도굴하려던 사건으로 당시 민심은 크게 외세를 배격하는 방향으로 요동쳤을 것이 분명하다.

군주의 아버지란 배경 외에 정치적 입지가 취약하던 대원군에게 백성의 지지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대원군은 무리하게 경복궁 중건하는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는 실정을 펼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민생경제는 파탄 직전이었다.

이에 따라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민심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대원군은 내적 결속을 위해 강한 외부의 적인 서양세계로 백성들의 화살을 돌렸고(쇄국정책) 이를 통해 내적 결속과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결국 대원군이란 인물 자체는 결코 보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내정에서 조선왕조에서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책들을 추진했고 그에게 보수주의자라는 이미지를 씌운 쇄국정책 또한 군사기술 수입에는 적극적이었고 근본적으로 정치적 판단이 섞인 결정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서울시정일보 황문권 기자 hmk0697@msnews.co.kr

본지 모든 기사 무단 전재 금지 / 이미지 : 블로그 군사세계KBS 방송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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