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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꿈꾸는 섬" 진도에 가다. (上)

내 안에 "꿈꾸는 섬" 진도에 가다. (上)

  • 기자명 박용신
  • 입력 2017.07.31 09:00
  • 수정 2017.09.2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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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일보 = 박용신 기자]

그 섬에 가고 있다. 섬은 외로운 방랑자의 안식처이다. 지친 탐미주의자(耽美主義者)의 마지막 희망처 이기도하다. 아무렇게나 닿을 수 없는 거기, 그 섬에 가서 이제 나는 한동안 나를 지배하던 권태로부터 자유로워 질 것이다. 무기력하게 보낸 세월에게 사과하고, 그 섬에 사는 사람들과 한끼 식사를 나누며 흙 묻은 손 마주 잡고 춤추고 노래할 것이다. 섬사람으로 그들과 하루를 살며 작은 일에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를 배워 다시 내일을 살아 낼 것이다. 그대와 나 가슴에 간직한 "꿈꾸는 섬" 찾아갈 꺼다. 희망이 지칠 때 까지.

# 이 진도대교를 건너야 '꿈의 섬'에 갈 수 있다. 바로 밑이 명량대첩으로 유명한 울돌목이다.

진도에 가고 있다. 조금은 넓어서(제주도, 거제도 다음으로 큰섬)섬 같지 않은 섬, 당신은 진도하면 먼저 홍주(紅酒)나 진돗개를 떠 올릴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나, 진도의 속내에는 격 높은 예(藝)의 문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아는 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흔히들 남도를 예술의 고장(藝鄕)이라고 한다. 그러한 이름을 듣기까지 그 밑바탕에는 진도가 있다. 진도에서는 아무리 쓰러져 가는 초가라도 집집마다 서화 한 점씩은 마루 벽면에 빛 바랜 가족사진과 함께 떡하니 걸려 있고, 지나는 마을 어귀 누구를 만나든 소리(남도소리) 한마디쯤은 즉석에서 한가락 들려준다. 이미 진도아리랑, 강강수월래, 소포걸군농악 등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음은 그만큼 진도 사람들에게는 시, 서화, 가무가 생활 그 자체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신의 편견을 지우기 위해 이제 천천히 진도의 속살을 애무하며 깊은 사랑에 빠져 보자.

#용산역에서 목포역까지 살같이 왔다. 아침 먹고 느긋하게 목포와서 세발낙지에 소주 한잔, 가능한 하루.

 

#지금은 진도에 가기 위해 목포에 왔지만, 나는 종종 남도 여행을 위해 이 목포역에 자주 올 것이다.

오전 7시40분 용산역에서 KTX 기차를 탔다. 이번 여행길은 미지에 대한 설레임보다는 오랜만에 기차역 시발점에서 종착역인 목포역까지 간다는 완료형 성취감이 나를 조금 더 들뜨게 했다. 언젠가 목포에 왔었던 기억, 엉금엉금 기는 완행열차를 타고 지루함으로 지쳐 갈 때쯤 녹초가 되어 도착했던 역, 내 안에 멀었던 그 역, 그러나, KTX는 2시간반만에 나를 목포역에 데려다 주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며 '눈 깜빡할 사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남도는 호남고속철도 개통 덕에 날개를 달고 서울과 일일 생활권에서 친밀한 교류를 하고 있다.

#진도 전도. 여행경로 : 진도타워▷운림산방▷진돗개선수촌▷장전미술관▷남도석성(진성)▷서망항▷세방낙조▷소포리 전통민속체험관▷운림삼별초공원 한옥마을(숙소 1박)

1박 2일의 일정, 일행들과 목포역에서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오른다.30여 분, 드디어 해남을 지나 진도에 관문 진도대교를 건너고 있다. 이제 나는 진도에 랜드마크인 진도타워와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선생의 말년의 작업실 운림산방, 진돗개선수촌(진도개 공연장), 장전미술관(남진미술관), 남도진성, 세방낙조를 관망하고 소포리로가 주민들이 직접 들려주는 전통남도소리를 들어볼 것이다. 그리고 이튿날, 이번 여행의 종착지 관매도(觀梅島)에 갈 것이다. 관매도는 나의 이상형 안식처 '꿈꾸는 섬'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진도타워.7층전망대에 오르면 진도대교, 울돌목, 세방낙조, 월출산, 두륜산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순신장군이 전함에서 항전을 독려하고 있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타워공원에 설치한 조형물.)

◇진도에 관문 진도대교와 랜드마크 진도타워

난세의 영웅들은 어디로 갔을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어디는 12척, 어디에는 13척, 그게 무슨 대수인가?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 왔다. 울돌목, 명량대첩 역사의 현장에는 파도만 치고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 모습,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조선의 우리 어머니였을, 누이였을, 아낙들이 이순신 장군을 도와 왜구들을 교란하기 위해 피눈물 흘리며 펼쳤던 춤사위, 망금산이 보인다. "생즉필사(生卽必死), 사즉필생(死卽必生)" 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부하들을 독려하던 이순신장군의 목소리가 나를 재촉한다. 침묵하는 시대의 지식인들이여!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 바다가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진도타워에 오른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2013년 11월에 준공된 이 타워는 지상 7층으로 홍보관, 역사관, 명량대첩 승전관, 등으로 꾸며져 있으며 7층이 진도대교, 울돌목과 세방낙조, 영암 월출산, 해남에 두륜산까지 조망 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해 있다.

#명량대첩 승전관 입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장군 영정. 온화함과 기개를 느낄 수 있다.

#아직도 울돌목 바다는 우는소리를 내고 흐르고 있었다.

◇ 예향의 주추(柱礎) 운림산방

진도의 얼굴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은 진도가 품격있는 예향(藝鄕)으로 거듭나게 한 일등공신이다. 진도에서 운림산방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운림산방은 조선말기 남종화의 대가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903)선생이 말년에 작업하던 화실의 이름으로 그의 손자인 남농 허건이 1982년 복원하였다. 소치선생은 20대 해남 대둔사의 초의선사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추천으로 추사 김정희선생 문하로 들어가 그림을 익혀 남종화의 거목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그의 소질을 높이 산 추사 김정희선생은 소치라는 호도 지어주며 시,서,화, 삼절(三絶)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그의 화맥은 자손들에게까지 이어져 200여년 동안 5대에 걸쳐 9인의 화가를 배출하였으며, 소치 가(家)의 영향을 받은 진도에는 국전에서 입상한 화가들이 꽤나 많이 있다.

#운림산방 전면 화실. 연못은 오각형이다. 연못 안에 나무가있으니 곤(困), 곤할곤 자가 되기 때문이란다.

#운림산방 중간 기거처. 소치께서 곰방대라도 물고 헛기침이라도 할 것 같다.

#소치 허련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 서각화가 걸려 있었다.

#세한도 (추사:김정희) 국보 제180호. 세로 23㎝, 가로 69.2㎝. 종이 바탕에 수묵. 제주도 유배 중 북경(北京)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 준 제자인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1844년(헌종 10)에 답례로 그려 준 서화. 김정희는 이 그림에서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 제일 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표현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소치선생의 스승이었다. 소치 사당에 걸린 세한도 서각화. 장무상망 (長毋相忘)"오랫동안 잊지 말자."라는 낙관이 오른편 끝에 찍혀있다.

#소치선생의 대표작 "운림각도"이다. 선면산수화로 종이에 담채.( 21×60.8cm) 화제는위당 정인보 글씨다.남종문인화로 갈필과 갈색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이그림은 영인본으로 진본은 서울대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소치기념관에서)

# 운림산방을 복원한 남농 허건의 삼송도(129×66cm)이다. 소치 선생의 손자인 남농 선생도 활력 넘치는 소나무 그림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소치기념관에서)

진돗개의 묘기공연을 볼 수 있는 진돗개선수촌

#진도는 진돗개 보존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으며 진돗개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진돗개 공연도 진행한다.

 

진도읍 동외리에 위치한 진돗개선수촌은 진돗개의 묘기와 영리함을 확인할 수 있는 공연장이다. 잘 훈련된 명견들이 줄넘기를 하고 그림도 기리며, 글자를 선별하며 주인이 찾는 냉장고 물건들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그러나, 동물의 특성상 힘들어 하거나 명령을 거부하는 사태도 발생, 측은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진도에는 개가 붓을 물고 난을 치고, 태백에는 강아지가 돈을 물고 술을 마신다나. 진짜, 진돗개가 난을 치고 있다.

# 영리한 진돗개가 날쌘 몸놀림으로 조련사와 줄넘기를 하고있다.

진도개는 진도의 토종견으로 진도라는 섬의 특수한 지리적, 문화적 환경에 수세기 동안 적응하면서 고유의 품종으로 유지, 정착되어 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견(國犬)이다. 머리가 명석하여 주인 말을 잘 들으며 충성심이 강하다. 이러한 특성으로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진도군에서는 순수 혈통 보존을 위해 혈통증명서를 발행하는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진도에는 3,000여 세대의 농가에서 11,300여 두의 진돗개가 사육되고 있다.

#고도의 훈련없이 저게 될까?. 잘 하다가도 이탈하는 녀석이 있었다.

◇고향을 사랑한 어느 예인이 마련한 장전미술관

# 장전미술관 경내. 아기자기한 예쁜 미술관이었다. 투박한 소나무가 이채롭다.

임회군 삼막리에 자리한 장전미술관은 서예가 장전 하남호(1926~2007)선생이 고향에다 사재(私財)를 들여 1989년11월29일 건립한 사립 미술관이다. 선생은 소전 손재형 선생에게 글씨를 사사했으며 예서와 행서에서 동국진체의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였다. 발군의 실력으로 국전에서 여러 번 입,특선하고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보관문화훈장과 세계평화예술상을 받기도 했다. 미술관은 800여평 대지에 본가인 남진정사, 연원관, 온고관의 한옥 건축물과 지상 3층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관 뜰에는 관장을 맡고 있는 셋째 아들 조각가 하영생씨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격조를 높여 준다.

#장전 하남호 선생의 글씨(다하군가대복,장락무천하부)작품. 가내 큰복받고 즐거우라는 얘기.

# 소하 박승무의 설경과 도촌 신영복의 산사 그림이다.


미술관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남진(南辰)미술관"이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는데 이는 선생의 성함 하남호에서 '남'자를 따고 부인 곽순진 여사의 성함중 '진'자를 따와 지었으나, 가수 남진을 연상케 한다 하여 선생의 호를 딴 남진미술관으로 개칭하였다. 미술관에는 선생의 주옥같은 작품과 추사 김정희,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전 안중식, 월전 장우성 등, 선생이 수집한 국보급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선생의 딸 4녀 하송자씨의 퀼트 공예작품이 곁들여 전시되어 있고 판매도 한다.

이곳에서 뜻밖에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매화도를 보았다. 행운이었다.

◇ 남도 진성(석성)과 쌍운교단운교

#평지에 쌓은 이 성은 삼별초들의 한이 서린 석성이다. 성이 축조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남도진성(사적 제127호)은 임회면 남동리에 위치한 석성이다. 평지에 쌓아진 이성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성(城)의 시간을 되돌려 보면, 고려 정부군이 몽골군에게 항복하자 이에 반기를 든 배중손 장군이 강화도에서 삼별초 별똥부대와 천여척의 배를 이끌고 벽파진으로 내려왔다. 삼별초는 이 곳 진성으로 입성하여 이를 본거지로 삼고 자주 평등세상을 기치로 또 하나의 고려정부를 세웠으나, 삼별초는 일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여몽연합군에게 함락되었고, 배중손 장군도 굴포리 포구에서 전사하고 왕으로 세운 온왕도 도망가다 논수골에서 잡혀 죽게 된다. 이렇듯, 이성은 또 다른 세상을 꿈꾸던 삼별초들의 한이 서린 유적지이기도 하다. 하여 이성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성은 조선 초, 왜구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호진을 설치하고 재축성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길이는 610m, 높이는 5.1m이다. 이성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동·서·남문 등 3개 문이 있고 남문에는 옹성이 설치되어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성안에는 민가가 있었는데, 그들을 이주시키고 현재 동신대 문화박물관에 의해 관아터 발굴조사와 복원이 병행되고 있다.

#남박다리 단운교다. 아취형 다리가 아름답다. 촘촘하고 단단하게 축조된 남도석성 서문이 보인다.

#쌍운교다. 1930년 주민들이 세운 다리이다.

성 앞으로는 인공으로 조성된 개울 위에 아담한 무지개 다리 두개가 놓여 있다. 이 다리가 단운교(4.5m)와 쌍운교(길이 5,5m)이다. 이 다리를 주민들은 남박다리라고도 부른다. 다리의 축조 방법은 다리가 설 장소에 개울 바닥부터 둔덕까지 지지대 역할로 나무를 채우고 그 위에 납작한 돌들로 이쪽과 저쪽 이마를 맞춰 둥그렇게 틀을 딱 맞춘 후 위에는 주먹만한 돌맹이와 흙으로 덮고 단단하게 다진 뒤 나무에 불을 붙여 태우면 가운데 아취형 공간이 생기고 그 곳으로 물이 통과하게 된다. 정말 기발한 생각으로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할 밖에. 축조년대는 단운교가 1870년대 나이가 150살쯤 되었고 쌍운교는 1930년 주민들이 세웠다. 앙증맞게 아름다운 교각 앞에서 내내 한참을 서 있었다.

◇ 저 붉은 햇덩이를 어쩌란 말이냐. 세방리 낙조

#천지가 홍주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전망대에서 홍주를 마셨다. 너나 모두 붉게 붉게 물들어 가며.

 

내 언제 저토록 붉게 타올랐던 생전이 있었던가. 울컥, 너를 사랑할 때도 나는 그렇게 붉지 않았다. 그렇게 타오르지 못했다. 어쩌란 말이냐. 저 붉은 햇덩이를. 멀리 섬들이 기묘한 황금빛 물결 속에서 한참을 춤추고 있었다. 촛불이 제 몸을 살라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숨이 멎을 것 같은 정점의 뜨거움, 그리고 노을꽃, 이제 돌아 가야한다. 해가 귀의(歸依) 하고 있다. 섬 뒤에 섬, 그 뒤에 또 섬들이 하루를 숙연하게 기도하며 마감하고 있다. 주지도(손가락섬), 양덕도(발가락섬), 불도(부처섬), 잠두도(누에머리섬), 가사도(부처님 옷섬), 장도(긴섬), 멀리 양덕도 그리고 신안의 하의도까지 저녘 예불을 마친 섬들이 중중무진(重重無盡) 화엄(華嚴)세계로 침잠하고 있다. 저 신성(神性)스런 자연은 내게 무얼 가르치려 했음인가?

# 나와서 해를 보라. 손대면 타 오를 것 같은 저 둥근해를 보라. 내일이 있기에 이별을 말하지 않는 해를 보라.

세방낙조 전망대는 진도 서쪽 끄트머리에 있다. 지산면 가학리 해안도로 길을 달리면 어디서나 낙조를 볼 수 있지만 여러 포인트를 관찰해 선정한 이 곳이 최고란다. 우리를 안내해준 이평기(해설사.시인. 56세)씨는 이 곳 낙조가 아름다운 이유로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경계선에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빛의 파장이 다르기 때문이란다. 세방낙조의 장관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는데, 여러분들이 오늘 낙조를 보았으니 덕들을 참 많이 쌓으셨나 보다며, 오늘 구름이 살짝 끼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홍주는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섬들이 취한다.이생진 시인의 바다는 성산포에 있는데, 세방바다는 나를 안는다.

퍼질러 앉아 술을 마신다. "그제야 술이 묻는다/너는 술만큼 진하냐/너는 술만큼 정직하냐/이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내 얼굴빛/내 얼굴빛이 홍주빛일 때/비로써 내게 홍주 마실 자격을 준다 (이생진 시인의 '허여사_진도 홍주' 중. 허여사-진도홍주기능보유자,작고)"

# 그렇게 붉었던 해도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돌아갈 시간. 그대에게 전화를 건다.

◇ 사람 사는 냄새, 그리고 남도소리

갑자기 어머니가 생각났다. 이맘때 푸른 콩밭에 파묻혀 김을 매시다 허리를 펴시며 흥얼거리시던 그 애절한 호미자루 장단의 노래가락이 떠올랐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리라가 났네." 가슴에 한 서린 응어리를 토해 내듯 부르시던 어머니의 노래를 이 곳 진도 소포리에 와서 나이 지긋한 아낙들에게서 듣는다. "오늘 내가 당신에게 이 노래를 받치니 잘 들어주소서!"같은, 눈물이 핑, 차 오르는 뜨거움. 소박하고 진솔한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변변치 않은 식사는 잘하셨냐고 .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우리들의 미숙한 공연도 잘 보아 달라고. 체험관 관장을 맡고 있는 김병철(63)씨의 안내.


그들은 누구인가? 왜 나를 감동으로 눈물나게 하는가. 밭을 매다 논을 갈다 달려 와서는 노래를 불러주고 장고를 쳐주고 함께 춤을 추어 준다. 우리 언제 만났었던가? 내 어머니 아버지 같고, 누이동생같은 그들이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다. 소리를 들려준다. 육자배기, 흥타령, 진도아리랑, 어쩔 수 없이 고단한 섬속의 삶 속에서 그들은 소리가 밥이고 소리가 사랑이었을 것이다. 육자배기나 아리랑이나 추음새 따라 잘 넘어가다가도 한 서린 그 무엇을 토해내듯, 애끓는 애절함, 가슴속 울분같은 것, 도대체 가락의 그 공명(共鳴)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남례(83) 어르신의 흥타령, 육자배기, 아리랑으로 어깨춤이 절로 나는데, 저 진득한 소리는 어디서 오는가? (소포리 검정쌀마을, 전통민속체험관에서)

<문경세제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가 눈물이로구나.> 어? 문경세재? 왜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지. 여기서 우리가 한번 곰곰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왜 진도아리랑의 "문경세재는 웬 고갠고." 무심코 경상도 문경세재가 입에 달고 나올까? 진도사람들이 저 먼 문경엘? 필자가 얼마전 어느 술자리에서 지인 김성문(단소명인.69)선생께 이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의 동문 송현(시인.69)선생이 이를 잘 알고 송사까지 해 가며 바로 잡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문경세재는 진도 성문 앞에 야트막한 고개가 "문전세재"라는 사실을 논문 등을 통하여 입증하였다는 사실을. 그러나, 아직도 문헌 등, 많은 곳에서 진도아리랑의 "문경세재 ▶ 문전세재"로 고쳐지지 않고 있다.

# 우선 흥타령부터, 그대 나의 창가를 들어 주오. 정이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 그냥 다 내어 주는 것.

그랬을 것이다. 진도에 살아온 사람들은 울돌목의 거친 물살처럼, 편안한 삶보다는 목숨을 전제로 한 아슬아슬한 삶이 더 깊었으리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많은 주검들이 입을 닫은 채 지금껏 침묵하고 있다. 역사는 4백여년 전, "명량대첩"에서 승리한 이순신장군의 전공만 이야기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장군은 신안 당사도로 돌아갔고, 패전한 왜군들은 돌아가지 않고 다른 섬에 숨어 있다 수시로 진도에 상륙하여 많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 도륙 했다. 그냥 앉아서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내 민초들. 고군면 도평리에 있는 '정유재란 순절묘역', 억울한 주검만 230여기, 무덤이 큰 언덕을 이루고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진도의 사람들은 대첩으로 죽은 왜구의 시체가 떠내려 오자 이를 수습해 고군면 내산리에 있는 "왜덕산"에 고이 묻어 주었다.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산 이름도 그렇게 불렀다. 전쟁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진도의 사람들의 도리(道理)를 알 수 있음이다.

#임강택(58)씨의 북춤, 이제 좀 무르익어 가고 있다고 마을 어르신들이 귀뜀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740여 년 전, 진도 석성에서도 언급했듯이 삼별초 토벌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을 것인가. 삼별초가 입성한 날부터 진도는 반역자를 도와 준 또다른 역적으로 매도당했을 테니까. 자의든 타이든 이런 저런 이유로 만만한 백성들만 희생되었을 터. 이렇게 억울한 죽음 앞에서 무기력했던 민초의 산자들이 운명적으로 감내해야 했던 가슴 치는 한(恨)은 바다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홍복동(83)어른의 채상모. 땀을 흘리시면서도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이 두 역사적 사실 안에는 운명처럼 진도가 두껍게 두르고 살아가야 하는 거친 바다 울돌목이 있다. 소리내어 우는 바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도 울돌목에 거친 물살을 이용했고, 삼별초도 울돌목에 거친 물살을 이용해 안전을 도모했었다. 어쩜, 저 거친 바다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비극들은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고난의 세월을 진도에서 살아 내면서 자연스럽게 그 한(恨)이 소리에 스며든 건 아닐까? 그 진득 진득하고 땀내 나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본래 야트막한 산과 들, 그리고 살가운 해풍, 그래서 순박하고 정많은 사람들,

 

어쩜, 우리내 진도 식구(食口)들은 태어날 때부터 흥이 많고 인정이 많고 인연의 끈을 소중히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두손을 마주잡고 어떻게 이렇게 이런 먼곳을 왔느냐고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같이 밥한끼 먹고 가라고 반가워서 눈물을 글썽이는 그런 사람들... 그동안 뭐하고 왜 이제야 왔느냐고. 그래서 창가도 그렇게 부른다. 끈적 끈적 가슴에 녹아들어 아예, 눌러 살라고.

#모두가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 그렇게 우리는 밤이 새도록 하나가 되어갔다.

<上편 맺음>
얼마나 아팠을까? 이것도 아프고 저것도 아프고 나도 아프다. 긴 세월 동안, 고립 아닌 고립 속에서 외롭고 슬프고 침묵으로 감내 했어야만 했던 고단의 세월, 볼이라도 부비며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리고 진도항이라고 이름도 바꿔야 하는 말 못할 그 무엇도 이해하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그들에게도 사죄하자. 정말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고, 모두에게 미안하다고. 자주 또 오리다.

<下편, '꿈꾸는 섬' 관매도가 이어집니다.>

서울시정일보/ 논설위원

팸투어/여행문학가

"풀잎편지" (Photo Healing Essay)

기사등재. 2017.7.31

(박용신 기자, 진도, bagam@hanmail.net)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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