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최종편집:2024-03-28 20:01 (목)

본문영역

다산유적지 그리고 운길산 수종사- 양수리 2부

다산유적지 그리고 운길산 수종사- 양수리 2부

  • 기자명 박용신
  • 입력 2017.07.21 09:24
  • 수정 2017.09.22 10:59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학자가 되고 선승이 된 하루

 

▲ 강변 다산공원에서 바라본 팔당호. 생태 습지에 수생식물들이 팔팔하다.

 

[서울시정일보=박용신 기자]다산유적지와 다산생태공원은 능내역에서 야트막한 쇠말산 언덕을 넘어 1.5km, 20분쯤 강변쪽으로 걸어가면 나온다. 다산유적지 앞은 북한강과 남한강 그리고 광주에서 내려오는 경안천까지 합류하여 너른 팔당호를 이루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작은 섬도 보이고 매우 아름답다. 즉, 다산 가(家)는 이렇듯 아름다운 강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셈이다. 부친이 진주 목사를 지냈는데 어떻게 이 곳에서 살게 되었을까? 지금에야 살기 좋은 명당 터 일지 몰라도 예전에는 보잘것없는 어촌 마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유적지 뜰에 세워져 있는 다산 정약용 선생 상.

#이 그림은 겸재 정선이 그린 독백탄이다. 두물머리 강 앞에 족자섬이 있고, 그 앞으로 큰 여울물이 흐르는데, 이 것이 족잣여울 즉, 독백탄으로 그 것을 표현한 그림이다. <진본 간송미술관 소장.>

#다산이 그린 우경산수도이다. 고향을 사랑한 다산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 茶山 丁若鏞1762~1836) 선생은 경기도 초부면 마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으며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에게서 인간의 덕목과 학업을 배웠다. 우리는 선생하면 우선 강진의 유배, 아, 목민심서의 저자, 청렴 결백한 선비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선생은 10세 이전에 시(시집 : 삼미자집 참조)를 쓴 천재 문장가이기도 하고 실학(실생활의 필요한 학문)사상을 집대성한 대 학자이기도 하다. 18년을 유배(천주교 박해와 연루)생활을 하며 집필한 저서가 500여권이나 되니 참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관직생활 중, 농민 이계심의 난(조세저항운동)을 일으키자, '부패한 관리들에게 항의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해 탄핵을 받기도 했다. 집필한 많은 책들 중 <1표 2서>라 불리는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가 3대 대표 저서이다.

#다산 기념관. 다산의 유물들과 저서, 편지들이 진열되어 있다.

#다산기념관 초입, 정약용선생의 모든 것을 빨리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다산이 고안한 거중기를 이용, 수원 화성을 쌓고 있는 모형도이다.

#다산이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고안한 거중기이다. 이 기구는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데 사용되었고 4만냥의 경비를 절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산의 생가 여유당(與猶堂)과 배다리 모형이다. 배다리는 정조13년(1789),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길 때 다산 선생의 제안으로 뚝섬에 배를 연결지어 위에 널판지를 깔아 설치했던 다리이다.

먼저, 다산유적지에 들면 다산문화관을 만나고 그 앞으로 선생이 수원 화성을 지을 때 활용한 거중기모형이 놓여 있다. 안으로 들어 서면 정면으로 다산기념관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여유당 뒤로 야트막한 언덕에 선생이 잠들어 있는 묘가 있다. 묘 앞에 서서 강변을 바라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다산공원으로 가 보자. 남양주시에서 제법 투자를 많이 해 오밀조밀 샛강을 따라 정자도 만들고 느긋하게 맨발로도 걸을 수 있는 흙 길을 만들어 유유자적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누가 되든 반듯이 둘이서 가기를 바란다. 저 아름다운 길을 혼자서 걷는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처량 하겠는가.

# 저 호젓한 물길을 혼자서 걷는 일은 외로울 꺼다. 정자에 앉아 산과 강물에 노래를 들었다. 비내리는 날에.

#부럽지 않은가?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저런 시간들이 있었다. 다만, 흘러갔을 뿐.

#다산생태공원 강가로 조성된 연밭이다. 아직 꽃은 많이 없다. 그냥 푸른 것 바라보면 나도 푸르러진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다산을 정리하면>
다산은 한강을 열수(洌水)라고 불렀다. 1776년(영조52) 15세에 관례와 혼례를 치루고 곧장 한양으로 분가를 하면서도 마음은 늘 고향에 남아 있었다. 1818년(순조18) 강진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의 호도 열수옹(洌水翁), 열초(洌樵)라 하여 한강에 사는 사람임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고향 마현에서 18년을 더 살다가 한강에 잠들었다. 다산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무수히 자신을 비춰 보고 한강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평생의 고민이자 꿈은 민생을 위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종합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국가였다.

#다산선생의 위용이 정정하다.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 하셨을까?

#다산 유적지 언덕(생가 바로 위)에 잠들어 있는 선생의 묘소. 왜 똑같은 비석이 두개일까?

<종소리 따라 수종사에 가다.>

#종소리를 들었다. 새벽, 북한강 물에 닿은 쇠북 종소리를, 소리가 멈춘 걸음에 끝, 거기 텅빈 내마음이 있었다. 이 종은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아들 성종의 안위와 장생복락을 발원하며 수종사에 시주한 종이다. 시주자로 수빈한씨와 정업원 지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발원, 간절한 바람을 담다. 展에서)

 

구름 걸린 산마루에 바람이 지난다. 비 그친 새벽, 양떼처럼 고개를 넘는 한 무리 안개는 산사(山寺)로 난 길들을 지우고, 키 낮은 청목들 잎새마다 그렁그렁한 이슬방울들, 첫 사랑 그리운 사미니(沙彌尼) 눈물 같다. 종소리가 강물에 닿아 애잔해 질 때, 세월 속에서 소리내어 통곡하고 싶었던 알 수 없는 날들의 응어리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가슴 문 열고 달아나고, 기다려, 바람이 다시 산문(山門)에 빗장을 풀고 지워진 길을 열 때, 비로소 환영을 본다. 비로자나불!, 나를 용서하는 시간들이 지나간다. 법당앞에서 가부좌 틀고 부처처럼.

#양평 용문사, 옥천 영국사 은행나무와 더불어 연세가 500세나 되신 은행나무, 세조가 심었고 높이가 35m 몸통 둘레는 6.5m나 되신단다.

운길산에 턱밑, 수종사(水鐘寺)에 왔다. 한 시간 반여, 양수다리를 건너 쉬엄쉬엄 올라온 산길, 흠뻑 땀으로 목욕을 했다.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에서 땀을 삭히고 정갈한 감로수로 목을 추긴다. 저 아래로 두물머리 두개의 강이 합쳐진 풍요로운 강이 들어오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4개의 다리가 보인다. 가뭄 탓으로 야윈 강들이 하얗게 흐르는 불쌍한 국토에서 여기 팔당호로 가는 물줄기들은 넉넉하게 물을 담고 유유자적 흐르는 부자 강이다. 조선조 사학자 서거정(徐居正)이 이 곳에 올라 발아래 펼쳐진 풍광을 보고 반해 자주 찾으며 천하제일 명당 터라고 경탄한 기록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펼쳐진 절경에 누구나 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두개의 강이 하나되는 합수의 지점이 유유자적 아름답다, 북한강쪽으로 4개의 다리가 보인다.

 

#수종사 대웅보전, 앞면3칸 옆면2칸에 자그마한 법당이다.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 중앙이 주불인 비로자나불, 왼편이 석가모니불, 바른편이 노사나불이다.

 

#부처의 수인(손모양), 왼편부터, 선정인(禪定印)으로 부처가 결가부좌 상태로 선정에 든 것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중앙은 지권인(智拳印)으로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며, 중생과 부처가 하나임을 뜻한다. 오른편은 시무외인(施無畏印), 여원인(與願印)으로 합하여 통인通仁)이라고 하며 중생의 우환과 고난을 해소 시키는 덕을 보여주는 수인이다.

 

전각 다실, 삼정헌(三鼎軒)에서 차를 마신다. 조사, 선사들은 차를 마시며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했다. 무슨 의미인가? 선(禪)은 자아(自我)의 성찰(省察) 안에서 궁극적 삶의 본질을 깨달아 평안해 지려는 수행(修行)이 아니던가? 정진(精進) 안에서 무념무상(無念無想)으로 마음의 평정을 찾아 우주의 공(空)과 합일 하려는 일, 차(茶) 역시 다례(茶禮)의 격식 안에서 선정(禪定)에 들어 고요함과 경건함 속에서 번뇌를 놓고 나를 다시 한번 되돌아 보고 관조(觀照)하는 일, 하여 선과 일치 하는, 이를 다도삼매(茶道三昧)라 하고, 결국엔 심경일여(心境一如), 물아불이(物我不二) 경지에 이르는.

 

#공짜의 차를 우아하게 마실 수 있는 삼정헌,

 

#돌틈에서 흘러나오는 석간수 한 잔, 알싸한 맛이 일품이다.

 

#항상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다기 세트가 준비되어 있다. 그냥 나오기 미안하면 적당한 금액을 보시함에 넣고 나오면 된다.

 

어렵네. 저자의 필부(匹夫)인 내가 선(禪)은 너무 멀다. 넓은 창틀에 담긴 북한강 수묵화를 감상하며 홀짝대는 공짜의 차 맛이 기막히게 좋다. 다성(茶聖) 초의선사와 다산, 그리고 추사선생은 수시로 수종사의 들러 차를 마시며 시(詩)와 선(禪)의 대해 얘기하며, 이 곳 차 맛을 천하일미(天下一味)라 극찬했다. 차인(茶人)들은 물맛이 좋아야 차맛이 좋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동감하며, 저 강화도 정수사의 물맛 또한 맛깔스럽던 기억, 거기도 위 다성(茶聖)들이 오묘한 차 맛을 찾아 즐겨 찾던 곳이다. 누구나 거리낌 없이 들러 공짜로 차를 마실 수 있는 삼정헌(三鼎軒)은 혹자는 초의, 다산, 추사와 연관이 있다고 말들을 하나 이는 봉선사 조실 월운 큰스님이 대중들이 누구나 찾아와 시(詩)선(禪)다(茶)를 즐기라는 의미로 삼정헌이라 명(名)하셨단다.

 

#보물 제1808호인 팔각오층석탑. 1957년 해체 보수 중, 1층탑신과 옥개석에서 19개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2,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 되었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 기록으로 성종23년(1493년) 조성 된 것을 알수 있다.이석탑은 규모는 그리크지 않으나 미려한 문화유산으로 학술적 가치가 높다. 복장유물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빈 껍데기가 되었다.

 

#오층팔각석탑 안에서 발견된 명빈김씨와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감과 불상들이다. 불상들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패서인이 되어 서궁에 유폐되어 살다 인조반정으로 다시 복위하자, 죽은 사람들의 왕생극락을 위해 자주 불사를 하며 불상도 시주하였다. 불상을 조성한 1628년 당시도 역모 사건 등으로 왕실이 불안한 상황이여서 왕실의 안위와 억울하게 희생된 가족들을 위해 이 불상들을 조성 시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단 중대석에서 발견된 비로자나불 대좌 바닥에 인목대비 불상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대웅전에서 저녁예불이 진행되고 있다. 모두가 조아린 자리, 간절한 념(念)으로 경건하게 부처를 부르는 시간, 스님들의 뒷모습이 청정하다. 나도 합장을 하고 예배를 드린다. 목탁의 울림통처럼 텅 빈 마음에 맑은 공명이 자리한다. 감사한 하루.

<맺음>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발걸음 따라 떠나 온 하루, 기차를 타고 문득, 이 곳에 내릴까? 버릇처럼 양수리에 내려 참 알차게 잘도 놀았다. 눈 감고도 선하게 그릴 수 있는 가까이에 있는 고향이어서 그냥 찾지 않았던 곳, 절에서 절 밥도 먹고 절도하고, 비내리는 샛강 길을 거닐며 새뜻한 바람도 맞고 정자에 앉아 신선도 되었다. 오랜만에 누린 혼자의 호사가 그대에게 미안하다. 다음에는 꼭 함께 할 것을 약속하며 종이배 하나 강물에 띄운다. 잘 논 하루에 대하여.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이 한지게 꽃 그대에게 드립니다. 좋은 날들을 위하여!

양수리 지역은 차가 무지막지 막히는 지역이다. 물론 양수리가 고향인 사람들만 아는 송우리 길이있지만 이제는 누구나 알음알음 다 알아 이곳도 막힌다. 그래서 이 곳은 전철이나 기차를 이용할 것을 권한다. 양수역이나 운길산역에 내려 자전거를 빌려 타고 둘러 보는 것도 방법이다.

서울시정일보/논설위원

팸투어/ 여행 문학가

 

백암 박용신의 "풀잎편지" (Photo Healing Essay)

 

기사등재. 2017. 7.21

(박용신 기자 :양수리에서 bagam@hanmail.net) 무단전재 배포금지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