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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현실은 여전히 낯설다

[섬진강칼럼]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현실은 여전히 낯설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1.02.02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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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 며칠 전 촬영해 두었던 구례읍 봉산과 오거리 그리고 인심 좋은 청자다방이다.
사진 설명 : 며칠 전 촬영해 두었던 구례읍 봉산과 오거리 그리고 인심 좋은 청자다방이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어! 어! 뭐야? 아이구야 죄송합니다. 내가 지갑을 집에 두고 왔나 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낮에 구례읍에 나갔다가, 단골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끔 가는 상설시장 채소가게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구한 뒤 돈을 지불하려고 보니 지갑이 없다. 여기저기 호주머니를 뒤져본들, 집에 두고 온 지갑이 있을 리가 없다.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는 크다면 큰돈이고, 내 입장에서는 별것 아닌 단돈 만원이지만, 그걸 지불할 돈이 없으니 사람 민망한 일이 돼버렸다.

순간적으로 이리저리 되짚어본 기억 속에서, 지갑을 집에 두고 왔다는 확실한 판단을 한 후, 구입했던 물건들을 다시 내려놓고, 거듭 죄송하다는 사과를 하고 가게를 나서 걷는데, 비록 산골 읍이지만 이렇게 난감할 때, 마음 편히 찾아가서 지금 필요한 돈을 융통할 곳도 없고, 돈을 가져오라고 전화를 할 곳도 없는, 구례읍의 거리가 쓸쓸하고 낯설기만 하였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갈 교통카드는 있어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늘 하던 대로 버스시간이 될 때까지 운동 삼아 걸어오는데, 오거리 청자다방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구례읍에 나갈 때면 항상 보온병을 들고 가서, 오거리 청자다방 커피 두 잔을 사다 집에서 즐기는 터라, 오늘도 보온병을 들고 나갔었는데, 오거리 청자다방 앞을 그냥 지나쳐오려니, 가방 속에 든 빈 보온병이 맘에 걸렸다.

짧은 순간이지만 몇 번을 망설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아주머니에게 지갑을 두고 온 사정을 이야기하니, 흔쾌히 허락하면서 목이 마른 내 심정을 어찌 알았는지, 목을 축이고 가라며 한 잔을 더 주는 걸 감사히 마시고, 사부작사부작 걷다보니 제비재를 넘어 신월마을 섬진강 다리 앞에서, 4시 10분 구례읍 터미널을 출발해온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섬진강이 마음의 고향이라면, 구례는 젊은 내가 봉산(鳳山)의 꿈을 찾아서 청춘을 보냈었고, 늙은 지금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봉산의 꿈을 실현시켜가고 있는 땅인데.....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 하던, 내가 매번 구례읍에 나갈 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오거리를 일부러라도 걸어 지나오면서, 청자다방 커피를 사들고 와 집에서 조용히 음미하는 이유다.

무엇보다도 오늘이 특별한 것은, 그동안 봉산의 꿈을 위해 살아온 내가, 어쩌면 이 강과 봉산이 자리하고 있는 구례에서 맞이하는, 마지막의 날이 될 수도 있는 입춘의 전날, 바로 내일 2021년 2월 2일을 위한 준비 차 구례읍에 나갔던 것인데, 지갑을 두고 간 내 실수로 쓸쓸할 뻔 했던 나들이가, 비록 커피 두 잔 3천원 외상이지만, 오거리 청자다방 아주머니의 흔쾌한 마음 덕에, 즐겁게 돌아올 수 있어서 좋았었다. 마치 봉산의 신령이 내게 주는 위로와 희망 같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나름 꼴에 곧 죽을지언정 지조는 지키겠다는 오기 하나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겪은 탓에, 이미 마음에 익숙한 일이지만, 오늘 비록 지갑을 집에 두고 간 실수로, 구례읍 길거리에서 느낀 감정이지만, 수중에 한 푼의 돈이 없다는 현실, 그 순간의 느낌은 여전히 멋쩍고 낯설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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