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겨울 하늘 숲 사이 외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찾아간 그곳은
파르르 더없이 맑고 향기로운 바람이 이는 골짜기였다.
하늘 닿는 나뭇가지 끄트머리를 흔드는 바람소리
크고 작은 음률을 타고 오는 마음을 씻는 냇물소리
건너편 냇가에 서서 어서 오라 반기는 다정한 임의 한마디에
늙은 내 눈과 귀가 한꺼번에 열리는 순간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이 그지없이 반갑고
신선이 그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동지섣달 초이틀 초저녁 아쉬운 꿈을 깬 지금
강촌의 늙은이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조금 전 꿈속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모아다가
내 쓸쓸한 침상의 벽에 오래도록 걸어두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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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녁 잠깐 아주 잠깐 깜박 졸았던 순간,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말 그대로 비몽사몽간의 일이었다.
겨울 하늘 숲 사이 외길을 따라 찾아간 그곳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음에도, 솔바람 물결소리가 맑고 향기로웠고, 무엇보다도 나를 설레게 했던 것은 보고 싶었던 아름다운 이가 살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인가. 코로나와 몰아치고 있는 세한(歲寒)의 한파를 핑계로 방안에만 갇혀 살다보니, 헛것이 보이나 싶어 내가 나를 의심했지만, 하도 생생한 것이 꿈이라면 몰라도, 정녕 내가 헛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뭐 어차피 생이라는 자체가 한바탕 꾸는 꿈속의 일이고, 우리가 사는 일들이 다시 또 그 꿈속에서 꾸는 꿈속의 꿈이고, 꿈이라는 것 자체가 헛것이니, 헛것을 보았다 한들 꿈이었다 한들 아무려면 어떠랴.
비록 초저녁 책상에 앉아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 깜박 조는 찰나의 순간 꿈속에서 찾아간 그곳이, 그 옛날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1418년~1453년)이 꿈속에서 보았다는 신선들이 머물러 산다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아니었지만, 꿈을 깬 내가 느끼는 것은, 멋지고 아름다운 날 숲속 길게 이어진 작은 오솔길을, 한참을 걸어 찾아간 산기슭 돌아앉은 고즈넉한 그곳은, 정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