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청렴인물 문화탐방

청렴인물 문화탐방

  • 기자명 황인혜기자
  • 입력 2011.10.13 14:23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 맹사성에서 조선 후기 이원익까지

【맹사성 고택 - 세덕사】
[서울시정일보 황인혜기자] 역사 속 청렴인물들의 유적지[경기 파주(황 희, 이율곡), 경기 광명(이원익), 충남 아산(맹사성, 이순신)] 이분들은 우리의 역사에서 공직자 및 국민의 귀감이 될 수 있는 청렴인물들이다. 이 분들의 청렴행적 및 청렴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며 또한 공무원의 청렴의식을 높이는 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청백리를 지낸 분들로 청렴 선현들의 삶의 자취와 청렴사상을 배워보자.

탐방 유적지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자 현실참여형 관료인 ‘율곡 이이’ 의 자운서원, ▲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크게 기여한 대표 청백리 ‘방촌 황희’ 의 반구정, ▲ 관용의 리더십 ‘오리 이원익’ 의 관감당, ▲혁신적인 전략으로 대표되는 구국의 영웅 ‘충무 이순신’ 의 현충사, ▲검소와 절제, 서민적인 행보로 위민정치를 실현한 ‘고불 맹사성’ 의 고택 등을 방문해 청렴위인들의 삶과 공직윤리 등을 살펴본다.

<청렴위인 1> 맹사성(1360∼1438/공민왕 9년∼세종 20년)

고려 말 조선 초의 재상.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좌의정에 올랐다.

《태종실록》을 감수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하는 등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률(音律)에도 밝아 향악(鄕樂)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작품에《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고향에 다닐 때에도 남루한 옷차림으로 행차하여 그 곳 수령이 잘 알아보지 못하고 야유를 했다가 나중에 정승이었음을 알고 도망치다 관인을 연못에 빠트려 훗날 그 연못을 인침연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검소하였으며, 청렴결백하고 절조를 지키는 인품으로 공평무사한 일 처리, 민정시찰 등을 통해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관심 있게 지켜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애민정치를 적극 실천하였다.
【반구정】
<청렴위인 2> 황 희(1363∼1452/공민왕 12년∼문종 2년)

조선 초의 문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했으나, 신왕조의 요청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대사헌, 병조, 예조,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고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한 조선의 최장수 재상이다. 과감하게 바른 말을 하는 성품으로 자주 파직과 복직을 당하여 관료로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으나 태종·세종을 거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청백리이자 명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건국 초기 조선의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농사의 개량, 천첩 소생의 천역 면제, 국방강화(야인과 왜구 방어), 4군 6진 개척, 문물제도의 정비·진흥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국가의 법이 혼란스러운 것을 수정·보완하기 위해 경제육전(經濟六典)을 간행하였다. 공무처리나 나라의 재물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엄격한 면모를 보이면서도 귀천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사람들을 너그러이 대하는 등 청렴하고 소탈한 생활을 영위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자운서원】
<청렴위인 3> 이 이(1536∼1584/중종 31년∼선조 17년)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정치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이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 다음해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3세에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을 하고, 이때부터 29세에 응시한 문과 전시에 이르기까지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을 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이라 일컬어졌다. 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하여 일선 정치에 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동호문답(東湖問答),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人心道心說)' 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또한 왕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국력 부강을 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만인평등의 입장에서 정치의 주체를 민(民)으로 규정하고 언로의 개방과 민의의 광범한 수렴을 통한 여론정치를 주장한 현실참여형 관료이자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학자로 수기치인형 청렴위인이라 할 수 있다.
【현충사 본전】
<청렴위인 4> 이순신(1545∼1598/인종 1년∼선조 31년)

임진왜란의 왜침을 막아낸 구국의 명장. 1576년(선조 9) 32세의 나이에 식년무과 병과로 급제한 뒤 함경도 변방의 동구비보 권관을 시작으로 훈련원 봉사, 사복시 주부, 조산보 만호, 정읍 현감 등을 차례로 역임하다 1591년 2월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발탁되었다. 이후 일본의 침략을 대비하여 군사 조련,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등 무기 제조, 진지 보수 등에 힘썼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연전연승 눈부신 전과를 거두었다.

옥포대첩,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을 거치며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모함으로 파직당하고 백의종군하였으며, 이후 복권되어 명량대첩의 대승 후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순신이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미래에 대한 준비, 청렴함과 강직함, 기본과 원칙을 기반으로 한 신뢰의 리더십 등은 그의 혁신적인 전략과 함께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발견·재해석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
【관감당】
<청렴위인 5> 이원익(1547∼1634/명종 2년∼인조 12년)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관료.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호조좌랑, 예조정랑, 정언, 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길을 수행하였으며, 이듬해 평양 탈환작전에 공을 세워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 3대를 걸쳐 여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오리 정승으로 널리 알려졌다.

1608년(선조 41) 대동법의 실시를 건의하는 등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시정하여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고자 노력하였으며, 안주목사 재직 시절 군병방수제도를 개혁하여 1년 3개월의 복무를 2개월로 단축시키기도 하였다.

이원익은 도량이 크고 심성이 한결같아 정적들에게도 호감을 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빈틈이 없었고 중국어 공부 등 자기 개발을 게을리 하지 않아 실력 면에서도 위아래 조정신료로부터 많은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직위가 1품에 이르렀을 때조차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에 기거하고 받은 녹봉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는 등 검소하고 따뜻한 삶을 산 청백리였다.
저작권자 © 서울시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