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정일보.이은진기자] 서울의 서쪽 관문, 독립문 사거리 옆 독립공원과 서대문형무소 뒤로 난 안산자락길이 그렇다.
안산자락길은 독립공원, 서대문구청, 연희숲속쉼터, 한성과학고, 금화터널 상부, 봉원사, 연세대 등 다양한 곳에서 쉽게 숲길로 들어설 수 있다.
게다가 어디서 시작하건 다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는 7km의 순환형 길로 만들어져 열두 달을 돌아 다시 1월을 맞이하는 시계(時界)를 공간으로 옮겨온 듯한 느낌마저준다.
겨울옷 입고도 제멋 간직한 자락길
영화보다 치열했던 투사의 삶 닮아
서대문형무소는 자락길로 통하는 대표적 관문이다. ‘흑수선’, ‘광복절특사’, ‘암살’, ‘밀정’ 등 최근까지도 많은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단순히 영화 촬영지라 하기엔 여느 곳에서 느껴지는 북적거림이나 산뜻함은 없다. 500명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 안에는 광복을 향한 혼만 남긴 채 스러져간 3000명 독립운동가들의 사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는 1908년 전국의 독립투사들을 투옥하기 위해 전국 15곳에 감옥을 만들며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을 지었다.
단순 수감시설을 넘어 구치소로서 일제가 취조와 고문을 일삼던 장소였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안산자락길을 가려면 한성과학고 북쪽 담장에서 시작하는 진입로를 찾으면 된다.
안산자락길이 놓인 안산(鞍山)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성으로 도읍을 옮기며 궁궐의 주산(主山)으로 생각했던 곳이라 한다.
태조가 도성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안산에 올랐다가 궁궐 자리가 협소하다고 여겨 이곳을 포기한 까닭에 지금처럼 북악산을 북쪽에 두고 한양도성의 경계가 그어졌다.
비록 임금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으나 안산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근 주민들의 숲길 산책로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서울시가 2010년부터 장애인이나 노약자들도 편히 걸을 수 있는 ‘무장애 자락길’ 사업을 추진하면서 300m 높이 산비탈에나무 데크를 깔아 2시간이면 가볍게 걸어낼 수 있는 자락길 코스를 만들었다.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지나면 작은 산이 옹기종기모여 있다. 여기서 자락길을 잠시 벗어나 안산봉수대에 오르면 발아래 인왕산과 남산이 자아내는 산수화가 펼쳐진다.
인왕산을 자주 오르내렸다는 시인의 노래가 무악(毋岳·안산의 다른 이름)까지 들려오는듯하다.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 사이에 자리한 서촌이다. 효자동, 청운동, 통인동 등 15개의 마을이 모인 이곳의 진짜 이름은 ‘세종마을’이다.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이라서다.
고층빌딩 대신 하늘을, 자동차 소리보다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를 품길 택한 마을은 영화 ‘최악의 하루’의 밑그림이 됐다.
주인공 은희(한예리 분)는 오래 만난 남자, 이전에 한 번 만난 남자, 처음 본 남자 사이에서 꼬여버린 하루를 보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배경은 수채화처럼 맑고 포근하기만 하다.
처음 본 남자 료헤이(이와세 료 분)가 길을 잃은 한옥마을엔 모두 ‘1호점’임에 확실한 갤러리와 카페, 식당, 옷가게, 일반 가정집들이 소담하게 붙어 있다.
고작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에도 버거울 만큼 좁다란 골목을 앞사람의 구둣발 소리를 들으며 지났다.
료헤이는 은희에게 무엇하러 길을 물었을까. 한옥마을은 헤매도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아담하고 얼마든 헤매도 좋을 만큼 정겹다.
발걸음을 망설이는 행인에게 갤러리 주인은 어서 오라 말했고, 자신을 PD라 소개한 카페 주인은 그의 정체만큼 미묘한 달콤쌉싸름한 모과차를 내왔다.
인왕산 자락엔 겸재가 남긴 인왕제색도의 진짜 ‘그림’이 걸려 있고, 현대 동양화단의 거목 박노수의 집엔 근대 예술가의 숨결이 잠들어 있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길이 만나는 곳은 영화 같은 추억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