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어제 낮에 구례읍 봉서리 산정마을 앞을 걷다, 초여름 산들바람에 밀알들이 통통하게 여물어가는 밀밭머리에 서서, 사진을 몇 장 촬영하다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났다.
반백년이 넘은 세월을 거슬러 돌아간 1960년대 내 나이 열 살 남짓 어린 시절, 향기로운 찔레꽃이 만발하는 들녘에서, 마른 풀들을 모아 불을 지펴 구워먹던, 밀 보리의 구수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굳이 뉘 집 밭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누구든 길가다 생각나면 한줌 꺾어다, 뒷산에서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즐겁게 구워먹던 그 시절의 정겨운 맛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손을 뻗어 이삭들을 한줌 꺾고 싶었지만, 그건 생각으로 끝내야 했다.
사실은 마음은 그 시절로 돌아가서, 통통하게 잘 여문 밀 이삭을 한줌 꺾어다, 옛날처럼 구워서 먹어보고 싶었지만, 비록 한줌일지라도 남의 밀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꺾으면, 죄가 되는 오늘의 현실을 깨닫고, 씁쓸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부연하면, 유행가 “보릿고개” 가사 내용 그대로, 굶주린 배를 찬물 한 바가지로 달래던 한 많은 그 시절,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먹거리가 귀하다보니, 초여름 딱 이즈음 잔심부름 겸 들일을 하는 어른들을 따라 나가면, 으레 간식거리로 밭머리 나무그늘에서 구워먹던 것이 밀 보리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정말 고소하고 맛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군침이 돌 정도로 생각이 난다. 마른 풀들을 모아 성냥으로 불을 지펴, 구워서 두 손바닥 가득 뜨거운 불기운을 느끼며, 후후 불어 비벼먹던 밀 보리의 구수한 맛을 잊을 수가 없는데........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는 입하(立夏)인 오늘 통통하게 여물어가는 밀 보리밭도 없고, 뻐꾸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밀 보리를 구워먹는 아이들도 없는, 강변의 한나절이 쓸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