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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 끝내 눈은 오지 않았다

[섬진강칼럼 ] 끝내 눈은 오지 않았다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0.02.04 00:28
  • 수정 2020.02.04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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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젊은 날에 이별한 첫사랑의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늙은이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눈이지만, 지난겨울 내내 한 번도 눈이 오지 않으니, 추억거리를 잃어버린 쓸쓸함을 넘어서, 이런 세월이 두렵기만 하다.

[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끝내 눈은 오지 않았다. 겨울에 눈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하는 입춘(立春)이 몇 시간 후 내일인데, 지난겨울 내내 눈은커녕 눈 비슷한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보내는 건 그야말로 평생에 처음이다.

늘 그렇듯 지난해 11월 8일 처음 입동(立冬)에는 이제 곧 눈이 내리겠거니 했다가, 소설(小雪)과 대설(大雪)이 지나도 눈은 오지 않았다.

연말에는 오겠지, 한두 번은 내리겠지 생각했지만 역시 오지 않았고, 해를 넘기고 소한(小寒) 대한(大寒)에는 오겠지 했는데, 설이 지나고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 내일 두어 시간 후인 지금까지, 끝내 눈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젊어서라면 첫눈이 내리거나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면, 멀리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보내는 길고 긴 편지를 쓸 좋은 핑계거리가 됐었는데.....

뭐 그렇다고 다 늙은 이 나이에, 함박눈이 꽃처럼 내리는 날 밤, 강 건너 과부댁이 술상을 차려놓고 기다린다는 언질을 준 것도 아니어서, 내가 눈이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릴 이유는 없었지만, 겨울에 눈이 오지 않으니, 마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뭔가를 잃어버린 느낌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제는 젊은 날에 이별한 첫사랑의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늙은이에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눈이지만, 지난겨울 내내 한 번도 눈이 오지 않으니, 추억거리를 잃어버린 쓸쓸함을 넘어서, 이런 세월이 두렵기만 하다.

가난한 민생들에게 겨울은 춥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지만, 해마다 몇 번씩 내리던 눈 구경을 못하고 보내는 이 겨울의 끝에서, 엄동설한의 동장군보다 더 무섭게 들이닥친, 온 세상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우한의 폐렴이라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신종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게재한 사진은 지난 1월 20일 우한 폐렴 확진자가 국내에서 처음 나왔다는 발표를 한 날 아침 창문 밖 하늘의 표정인데, 두 눈을 부릅뜨고 분노하는 것 같은 하늘은 무엇을 징벌하려는 것일까?

단군 이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가 그렇고, 촌부가 평생 처음 겪어보는 눈이 오지 않은 겨울이 그렇고, 듣도 보도 못한 신종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세월마저 덩달아 미쳐버렸다는 생각에,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은 나라 봄 같지 않은 세월이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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