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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내 뜰에서 금생의 인연을 다한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내면서

[섬진강칼럼] 내 뜰에서 금생의 인연을 다한 아름다운 장미꽃을 보내면서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20.01.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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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일보 박혜범 논설위원] 내가 처음 쓸쓸한 내 뜰에서 핀, 꽃말이 “사랑의 맹세”라는 한 송이 아름다운 분홍 장미꽃을 만난 것은, 지난해 겨울로 드는 입동(立冬 8일)의 11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때 이르게 들이친 혹독한 서리에 국화꽃들마저 견디지 못하고 얼어서 시들고 있는 뜰에서, 한줄기 가녀린 가지 끝에 맺힌 한 송이 분홍빛 꽃봉오리를 보았을 땐, 인연의 때를 잘못 만난 탓에 곧 얼어서 죽어버릴 거라는 뭐 대충 그런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보았었다.

사실은 솔직히 고백하면 내 마음이 여린 탓에, 애초에 피지도 못하고 이내 닥칠 겨울 추위에 얼어서 죽어버릴 장미꽃보다, 그걸 내내 지켜보아야 하는 내 마음이 더 슬퍼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그게 싫어서 처음부터 관심을 갖는 것 자체를 일부러 회피하며 무관심으로 지냈었는데, 11월 상순 소설(小雪 22일)이 지난 어느 날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한 송이 아름다운 분홍 장미꽃으로 보란 듯이 피어있었다.

그때 처음 본 만개한 아름다운 장미꽃은 꽃말 그대로 내 앞에서 “사랑의 맹세”를 증명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서 내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어찌나 나를 아프게 하던지, 나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었다.

그런 며칠 후 12월 초에 닥친 남도의 섬진강에서는 보기 드문, 때 이른 영하 7도의 혹한이 연이틀 몰아쳤을 때에도 아름다운 분홍빛 꽃잎 하나 털끝만한 흐트러짐이 없이 그 자태를 잃지 않았고, 어느 날 삼동의 긴 밤 내내 휘몰아치는 겨울 폭풍우를 견뎌준 장미꽃에게 나는 찬양의 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소한(小寒)의 절기가 지나고, 삼동의 겨울이 끝난 대한(大寒)의 절기를 지나, 봄이 오는 입춘(立春)의 길목에서, 내리는 겨울비에 아름다운 꽃잎에 남은, 한 점 분홍빛마저 씻기여 하얗게 바래져버렸어도, 끝끝내 기품을 잃지 않고 있는 장미꽃은, 홀로 아름다운 꽃의 정령이었고, 지난겨울 내내 촌부를 들뜨게 하며 꿈을 꾸게 하였던 마음속 설렘이었고 내 아픈 사랑이었다.

그런데 오늘 해질 무렵 어제부터 종일 오락가락 내리고 있는 겨울비에 젖고 있으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와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장미꽃을 보고 있으려니, 슬프고 안타까운 생각들이 엉키며 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런 혼란과 갈등 속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11월 중순 내 쓸쓸한 겨울의 뜰에서 아름다운 분홍 장미꽃으로 피어 엄동설한의 혹한을 보내고 봄이 오는 길목에서, 금생의 인연을 다하고 있는 하얗게 빛바랜 장미꽃을 꺾어서, 부디 꿈꾸는 대로 아름다운 꽃으로 영생하기를 바라는  내 염원을 조사(弔詞)로 읊으며, 그가 태어난 뿌리 곁에 정성을 다해서, 내 아픈 사랑으로 묻어주었다.

장미꽃이 지키려고 애썼던 그 아름다운 자태와 기품이 무너지고 망가져 추해지면, 장미꽃이 너무 슬퍼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장미꽃의 마지막 자존심을 내가 지켜주고 싶어서, 그를 내 손으로 꺾어서, 꽃은 허상이고 허물일 뿐 실상이 아니니, 다시 태어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영생하기를 바라는, 환지본처(還至本處)의 노래를 만가(輓歌 상여소리)로 부르며, 그가 태어난 뿌리 곁에 정성을 다해서 내 마음속 아픈 사랑으로 묻어주었다.

끝으로 지난 초겨울 쓸쓸한 내 뜰에 피어서 혹한의 긴 겨울을 보내고, 오늘 봄이 오는 길목에서 금생의 인연을 다한 아름다운 장미꽃이 남긴 모습들을 영원히 기억하여 잊지 않겠다는 내 아픈 사랑의 맹세로 여기에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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