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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섬진강칼럼]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며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19.12.2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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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 오늘 촌부가 구례읍에서 바라본 쓸쓸한 오산(鰲山)의 모습이다.
사진설명 : 오늘 촌부가 구례읍에서 바라본 쓸쓸한 오산(鰲山)의 모습이다.

 

[서울시정일보] 어려서는 간간이 마을 당산나무 밑에서 마을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로 들었고, 내가 성장하여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인가 절절하게 느껴보았던 말,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 말의 의미를 다시 절감하는 하루다.

예나 지금이나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면,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처음부터 정이 깊어서 만나는 인연은 없는 것이니, “드는 정은 모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끝났을 때, 그것이 서로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교감하던 관계라면, 또는 사랑하는 사이였다면, 그 관계의 정이 깊으면 깊은 만큼 두터우면 두터운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니, “나는 정은 안다.”는 말이 맞는 말이다.

굳이 통속적인 삼류 소설의 한 토막이나, 유행가 가사가 아니더라도, 정들었던 이와 이별한 후,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밀려오는 세상이 비어버린 것 같은 허전한 마음, 거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기처럼 느껴지는 쓸쓸한 마음과, 겨울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나뭇가지 같은 초라한 마음,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과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이어지는 길고 긴 그리움과 슬픈 감정에 대하여, 살아오면서 한번쯤 고통스럽게 아파본 사람들은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이 뭔지를 잘 알 것이다.

천 년 전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한 약사여래가 섬진강에 강림한 뜻을 연구하고 있는 촌부가 날마다 강을 건너는 버스를 타고 구례읍에 나갔다 오는 것은, 몇 가지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는 간절한 원을 이루기 위함이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어제 고인이 되어 영원의 세계로 떠나간 우진 선생을 만나는 즐거움이었는데.......

오늘 오전 일이 있어 버스를 타고 구례읍에 나가는데 내 마음이 그랬다. 특히 이정회내과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거리로 나섰을 때, 늘 걷던 습관대로 골목길을 따라 걷는데, 그것은 갈 곳을 잃어버리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초라한 늙은이의 몰골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맥없이 걷는 그런 초라하고 쓸쓸한 내 모습이 싫어서, 마침 눈에 보이는 가끔 선생과 함께 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던 카페로 도망쳐 숨듯 들어가, 예전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시켜 마시는데, 허전하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세상살이에, 한 사람이 죽어서 사라진 일이 뭐 대수겠는가 마는, 창문 밖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들은 제 갈 길들이 바쁘고, 빈 말이라도 “잘 가시고 잘 보내드렸느냐”고 한마디 물어 줄만도 한 낯익은 카페 주인은 커피 한 잔을 주문받는 일이 소중할 뿐.......

오늘따라 쓰기만 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다시 또 느끼는 것은, 죽어서 떠난 건 내 벗이고 쓸쓸한 건 내 마음일 뿐, 세상의 사람들에게 사람이 나고 죽는 일들은, 그저 흔한 일상의 일들이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궁색한 생각들이 싫어서, 서둘러 버스를 타고 강으로 돌아오는데,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봉산도 오산도 섬진강도 오가는 사람들도, 보이는 모든 것들이 쓸쓸하고 낯설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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