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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칼럼] 시대의 부름에 응하는 정치인 '정세균'을 위한 군자(君子)의 도(道)

[섬진강칼럼] 시대의 부름에 응하는 정치인 '정세균'을 위한 군자(君子)의 도(道)

  • 기자명 박혜범 논설위원
  • 입력 2019.12.13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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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정일보] 1100년 전 918년 6월 15일(양력 7월 25일) 왕건(王建)이 고려를 창업 세상을 구한 비결이, 섬진강 강변에 자리한 구례군 문척면 오산 바위굴에서, 경주 출신 혜철국사가 제자인 도선국사에게 전한 천하를 구하는 한 권의 도참서(圖讖書 앞날의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책)가 그 시작이었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일이고, 1392년 조선(1392~1910)이 탄생한 역사 또한 이성계(李成桂)가 도참을 바탕으로 일으킨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조를 바꾸는 정변)에 의한 까닭으로, 조선이 창업된 초기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도참서(圖讖書)를 보거나, 연구하는 것을 금하고 역모로 다스렸으며, 전국의 모든 도참서들을 수거하여 불태웠다.

이런 엄혹한 왕조에서 연산군(제10대 왕(재위 1494~1506) 당시 1499년 남해에서 이주한 사람이 구례에서 도참을 몰래 보고 연구했다는 이유로, 관련자들이 역모로 참형을 당하였고, 구례현은 폐하여 유곡부곡(楡谷部曲)으로 만들어 남원부에 귀속시켰다가, 1507년(중종2) 현으로 복귀하였는데, 그 이유가 잔수진(潺水津 구례역 앞)과 석주관(石柱關)이라는 2개의 요해처(要害處 적을 막고 지키는 중요한 곳)를 지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부연하면 석주관(石柱關)은 아득한 옛날부터 남해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와 선량한 백성들을 학살하며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을 막기 위해 호남 내륙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구례군 토지면(土旨面) 송정리(松亭里)에 있는 성(城)이고, 잔수진(潺水津)은 순천과 남원을 잇고 남해 바다로 드나드는 중요한 요처인데, 지금의 구례역 앞 섬진강이다.

사진설명 : 정유재란 당시 1597년 12월 17일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석주관 칠의사(七義士) 묘역 우측에 세워진 추념 비석 후면에 새겨진 글이다.
사진설명 : 정유재란 당시 1597년 12월 17일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석주관 칠의사(七義士) 묘역 우측에 세워진 추념 비석 후면에 새겨진 글이다.

 

이로부터 100년 후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년)이 일어나 나라가 멸망의 구렁에 떨어졌을 때, 한양에서 백의종군으로 길을 떠나온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국가의 보루인 호남을 지키기 위해 지목한 땅이, 저 유명한 석주관이였고......

1597년 12월 17일(음력 11월 9일) 1,000여 명의 의병과 153명의 화엄사 승병(僧兵)들이 석주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오는 적장 요시히로의 대군을 맞아, 결사항전 끝에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며, 옥쇄(玉碎) 항전(抗戰)의 역사를 피로 새겼고, 훗날 사람들은 이 의로운 충혼들의 넋을 기리며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 강의 이름을 “혈류성천(血流成川) 위벽위적(爲碧爲赤) 피가 흘러 강이 되니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하여 혈천(血川)이라 하였고, 오늘날의 피아골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음은 정유재란 당시 순국한 석주관 칠의사(七義士) 묘역 우측에 세워진 정유전망의병추념비(丁酉戰亡義兵追念碑) 후면에 글을 새기고 붉은 경면주사(鏡面朱沙)를 넣어 의병들의 단심(丹心)을 전한 명(銘)이다.

위국응모(爲國應募) 나라를 위한 부름에 
승려하택(僧侶何擇) 승려들인들 어찌 가리겠는가.
혈류성천(血流成川) 피가 흘러 강이 되니
위벽위적(爲碧爲赤) 푸른 물이 붉게 물들었다.
위주망신(爲主㤀身) 임금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여대지직(輿儓之職) 신하 된 자의 직분이다.
편석추명(片石追銘) 돌 조각에 옛일을 새기노니 
천추불륵(千秋不泐) 천추에 길이 남으리라.

위 석주관의 의로운 역사를 전하는 비문을 보면, 당시 선비들과 산중의 승려들이 누란에 빠진 국가와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이는 군자(君子)는 죽을 때까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할 뿐, 하루아침의 근심거리인 욕심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의 실천이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본에 의해 조선이 멸망하던 대한제국 당시와 일제강점기에 스스로 일어서서 저항했던 수많은 유명무명의 의병들과 독립군들이 가졌던 마음이고 실천한 정신이었다.

어제 보도된 뉴스를 보면, 마땅한 총리감을 구하지 못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권유를 한사코 고사해온 정세균 전 국회의장이 자신을 죽여 수락했다 하는데, 문제는 삼권분립이 확립된 민주국가에서 입법부 수장을 지낸 사람이 총리직을 수락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촌부의 결론은 간명하다. 한마디로 지금 문재인의 치세를 태평성대로 보느냐, 아니면 위기에 처한 난세로 보느냐는 것이다.

만일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문재인의 치세가 태평성대라 한다면 그렇게 본다면, 전직 국회의장 정세균은 굳이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될 자리를 탐한 것이니, 소인배가 맞고 비난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문재인의 치세를 절대 절명의 위기로 본다면, 즉 우리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나라, 국가와 국민이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위기의 난세로 본다면, 전직 국회의장 정세균은 자신의 이름에 덧붙이는 굴욕을 참으며, 오직 국가와 국민을 위한 길로 나가는 군자의 도리를 행한 것이니, 이야말로 선비이며 군자이며 현대판 구국의 의병장이라고 해야 할 일이다.

촌부의 결론은 시대를 앞서 간 개혁사상가이며, 백성을 사랑한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이 죽어 혼백을 묻은 땅이며, 선비정신의 상징인 섬진강의 시원인 전북 진안(鎭安)에서 태어난 정세균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자기희생이며 실천이라는 말이다.(정여립 사건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오늘 군자의 자기희생과 도리를 다하기 위해, 다시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로 출사하는 전 국회의장 정세균에게 촌부가 바라는 것은, 역대 총리들처럼 대독총리 앵무새 총리가 되지 말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둔 정여립의 개혁사상을 발현시켜, 국가와 국민을 위기에서 구하고, 항상 국민들의 마음자리에서 조금씩 진일보하여 나가는 정치, 당리당략보다 민생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를 한다면, 하늘과 국민들은 다 같이 정세균의 편이 된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시작부터 지금까지 내로남불의 정치로, 이미 그 실체가 드러나고 신망을 잃어버린 문재인 대통령이 전직 국회의장인 정세균을 총리로 모시는 것은,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묘법이며,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고, 위기에 처한 국가와 국민들에게는 나갈 길을 일러주고 안내하여 주는 좋은 길잡이를 만나는 격이니, 이야말로 하늘이 베푸는 사람과 시절과 국운이 서로 부합하는 참 좋은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끝으로 422년 전 정유재란 당시 1597년 12월 17일 왜군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석주관 칠의사(七義士) 묘역 우측에 세워진 추념 비석 후면에 새겨진 글을 다시 읽으며, 우리 시대의 정치인 정세균에게, 감히 새로운 희망을 가져본다.

섬진강은 안개를 삼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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