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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포커스] 김광영 그의 人生

[인물포커스] 김광영 그의 人生

  • 기자명 김상록 편집국장
  • 입력 2019.01.29 22:09
  • 수정 2019.01.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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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풍노도 청소년 시절, 죽기 살기로 공부해서 사관학교 진학
- 공천갈등과 계파갈등의 정치에 뛰어들어 낙선을 통해 배운 경험
- 자기성찰을 통해 내 이웃, 국가, 인류를 위한 공익을 일을 하고 싶어

[서울시정일보] 올해 81세를 바라보는 김광영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의 삶과 인생 그리고 그의 부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분에게서 처음 느낀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시간 약속이 정확하다는 것이다. 마치 현직 군인을 보는 듯하다. 약속시간보다 항상 10분 먼저 와서 기다리신다. 그리고 두 번째는 먼저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주변인들과 모두 인사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소위 노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이분에 대한 연구와 관심을 솜씨 없는 글이지만 지면에 남기고자 한다.

 

온 몸으로 이야기하는 80세 청년 김광영
온 몸으로 이야기하는 80세 청년 김광영

김 교수의 부친의 이력이 특이하다. 그의 부친은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치기공 기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치과기술자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제치하에서 양약사 자격증까지 따면서 구례를 거쳐 광양에서 양약방을 하는 등 파란만장한 자수성가의 삶을 살았었다. 덕분에 나름 부유한 유년기를 보내면서 소위 고생 모르고 주먹쓰기 좋아하는문제아였다고 한다. 공부보다는 주먹 센 사람을 부러워했던 철부지였다고 회상한다. 싸움만 1등이였던 그가 무작정 서울로 가서 느낀 것은 ! 공부를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구나였다. 그때부터 뒤늦게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쉬울 리가 없다. 참으로 억척같이 공부해서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주변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먹 때문에 교도소까지 갔던 문제아가 사관학교라니... 그때부터 김교수는 부유한 가정환경을 주셨던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 혼자 공부한다고 독립하며 살 때 음식의 고마움, 사관학교 시절에 꿈꾸던 애국심에 대한 생각들을 담아서 희망의 편지를 보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희망의 편지 보내기는 미국 루스벨트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국제 하베스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광주대학에서 행정학 교수로 일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광양 시민들은 그를 칠전팔기 오뚜기로 기억한다. 왜냐면 제 15, 16, 17, 18대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으나 번번히 실패를 맛보았으나 계속 도전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소속 또는 한나라당으로 출마를 했으니 민주당 텃밭이였던 광양에서는 그의 낙선은 정해진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인생에서 도전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가 희망을 편지를 아직도 지인들과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이유도 이런 화두(話頭)를 드리기 위함일 것이다.

김광영(金匡榮) 그는 이웃과 국가와 인류를 위한 공익을 꿈꾸고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불리면서도 현실정치에 계속 띄어들었다. 그리고 정치 후배들에게 공익과 바른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젊은이와 소통을 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80세라는 나이를 잊고 매일 운동으로 신체를 단련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와 웃음을 선사하며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그는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선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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