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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살아있는 의료역사

지역에서 우연히 마주친 살아있는 의료역사

  • 기자명 김상록 논설위원
  • 입력 2019.01.17 00:34
  • 수정 2019.01.17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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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치과치료사이면서 양약사였던 김봉오님을 생각하며...

[서울시정일보] 필자는 오늘 아버지의 지인과 식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고 그 와중에 지인의 아버지 얘기에 한창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박물관에서나 접할 수 있는 근대 의료 역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고 오늘은 그것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자 한다.

  필자는 1993년에 국립대 치과대학을 졸업을 함과 동시에 보건복지부 장관으로부터 치과의사 면허증을 교부받았었다. 요즘은 과거의 의대나 치대들이 대부분 의치학전문대학교으로 바뀌면서 4년제 대학을 졸업 후에나 대학원 응시 자격이 부여되고 그마져서 여러 번 낙방을 하다가 의치학전문대학원에 합격하더라도 대학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2배 넘는 비용을 들어서 졸업하는 것으로 전해들었다. 만약 필자가 요즘에 의사가 되려고 했다면 어려운 가정형편과 8년의 대학과정 그리고 4년여의 전문의과정 때문에 포기했으리라. 오늘 만난 김광영(金匡榮)씨는 올해 나이로 83세라고 한다. 그러나 건강한 73세로나 보일 정도로 젊고 등이나 허리가 굽지 않는 건장한 체격으로 지역사회에서는 건강관리를 잘 하기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러면서 필자는 그분의 아버지가 궁금하여 커피 한 잔을 나누면서 꼬치꼬치 여쭤보았다.

  그의 아버지는 김광영씨가 태어나기 전부터 구례에서 최초의 약사로서 양약방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을 거슬러 계산해보면 1930년 주변인 일제치하에서 양약사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셈이다. 아마도 그때는 초등학교라도 마친 사람이 지방에는 거의 없던 시절이라서 최초의 양약사 시험에 응시한 것도 어느 정도 잘 사는 집 아들이 아닌 이상 어려웠을 터이다. 그러나 그 부친은 20세 즈음인 1920년 즈음에 배고픈 곡성 고향을 떠나 먹고 살기 위해 무일푼, 무학력인 상태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치과의 보조원으로 여러 해 일하며 치과치료 기술을 어깨 넘어로 배웠다고 한다. 치과의사인 필자는 그분이야 말로 지역 최초로 선진 치과치료 기술을 습득한 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당시의 치과기술은 지금처럼 최첨단 장비를 사용하여 미세수술을 하는 수준은 아니고, 단지 이를 빼거나 이를 조금 갈아서 소위 산뿌라찌(sen bridge)라는 방식으로 빠진 이를 해넣는 기술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zen-sen이라는 일본식 치과 합금이 생산된다고 한다. 그 합금을 이용하여 양쪽 이를 연결(bridge)하는 치료를 산뿌라찌라고 일본식으로 발음을 했을 것이다. 아직도 치과를 찾는 어르신들은 그 산뿌라찌라는 말을 기억한다. 참으로 오래전 이야기이고 치과의사 시험제도도 치과교육기관도 없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말씀이시다.

세계 최초 치과의사 '피에르 포르샤' (1720년대)
세계 최초 치과의사 '피에르 포르샤' (1720년대)

 

  그러나 미국의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1913)한 쉐플리라는 치과의사가 치과의료선교를 위해 당시 세계 최고의 빈국에 속하는 식민치하 대한민국을 방문하게 되었고 당시 연세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교에 치과학 교실로 초빙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이나 일본식의 치과의사 시험제도가 차츰 정비됨에 따라 김광영씨의 부친은 무면허로는 치과진료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상대적으로 응시의 벽이 높지 않았던 양약사 시험을 준비하는 선견지명을 보이셨다. 어려서 식민지인 조선의 청년으로서 온갖 어려움과 설움을 겪으면서 일본에서 치과보조원으로서 인정받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치과 기술전수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젊어서 고생은 일본의 사회발전을 통해 우리나라의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의 안목을 부친에게 선물하였으리라.

(좌)1920년대 경성치의학교 실습실 (우)1940년대 경치전 정문
(좌)1920년대 경성치의학교 실습실 (우)1940년대 경치전 정문

 

  아직도 광양읍의 지긋한 어르신들은 광양 최초의 한국인 약국인 제일약국을 기억한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약국도 있었지만 가난한 집안의 한국인으로서 약국을 차릴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겠다. 그것도 20세에 현해탄을 건너 선진치과 기술을 익히고 고향으로 돌아와 최초의 치과치료를 시작하고 최초의 약사가 된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한편의 과거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필자는 아직도 현업에서 치과의사로 종사하면서도 편하게 쓰는 기구나 장비, 진료재료 그리고 간편한 건강보험제도 등의 감사함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선조들이나 일제치하의 치과치료를 생각하고 감기 몸살에 쉽게 사먹는 타이레놀 한 알을 생각하더라도 이것에도 많은 선배들의 얼과 혼이 깃들어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조선말 발치 사진
조선말 발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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